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3#01
"오빠 달려~~~"
몽글몽글 구름 낀 하늘, 그 아래 푸르고 드넓은 호수, 그 위를 달리는 하얀 보트,
그리고 그 안의 나와 J(와 함께 탄 대만 사람들).
미지근하고 끈적한 바람이 온몸을 때리고 지나갔다. 머리카락이 자꾸 얼굴에 들러붙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진짜 시원해요!"
옆에 앉아 있던 J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J의 말대로였다. 비록 바람은 좀 미적지근했지만 마음만큼은 엄청 시원했다. 어학당 종강했으니까!
J와 함께 탄 보트는 대만에서 제일 큰 호수라는 르웨탄(日月潭) 위를 달리고 있었다. 타이중을 대표하는 여행지인 르웨탄은 현지 발음으로는 '르위에탄'에 가깝고, 한국에서는 '일월담'이라고도 부른다. '일월담'이라는 이름은 호수의 한쪽 면은 해(日), 한쪽 면은 달(月)을 닮아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던데, 사실 봐도 잘 모르겠더라. 아무래도 대만 사람들의 상상력이 나보다 뛰어난 것 같다.
르웨탄! 대만에서 꼭 가고 싶은 곳 중이었다. 어학당 수업 교재에서도 찬양하기도 했었고, 대만 친구인 도리씨도 정말 정말 아름다운 곳이니 꼭 가봐야 한다고 강력 추천했었다. 그래서 어학당 종강하자마자 귀가 닳도록 들은, 해와 달의 호수로 달려온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멋지길래 다들 호평일색이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소문대로 호수가 크긴 컸다. 해발고도가 760m나 되는 높은 산 위에 이렇게나 거대한 호수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사실 르웨탄이 자연 호수가 아니라 인공 호수래서 감흥이 살짝 식을 뻔 했는데, 막상 직접 와 보니 이 높은 산에 호수를 만든 인간이 대단해 보였다.
르웨탄 가면 꼭 타봐야 한다는 보트를 타고 잔잔한 호수 위를 가로 질렀다. 오랜만에 배 타고 물 위를 달리니 그 자체로 좋았다. 그런데 좀 애매했다. 르웨탄의 풍경이 기대한 것만큼 엄청난 절경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진에서 봤던 에메랄드 물빛은 호수 가장자리의 극히 일부분에서만 눈을 크게 뜨고 봐야 볼 수 있었다. 크기를 제외하고는 르웨탄이나 한국의 저수지나 비슷해 보였다.
'엥? 이게 전부야? 인터넷에서 본 것보다 그냥 그런데...'
다행히 중간에 잠시 보트에서 내려 먹었던 '버섯 차예딴(香菇 茶葉蛋)'이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버섯 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대만에서 먹어봤던 차예딴 중에서 제일 맛있었다. 따끈하고 촉촉하고 짭짤하고 감칠맛 가득했던 차예딴. 5백 원 남짓한 이 계란 한 알이 르웨탄 보트 투어의 추억을 맛있게 보정해 주었다.
르웨탄의 진면목을 만난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아직 어둠이 드리운 새벽, 일출을 보기 위해 숙소에서 나섰다. 원래도 여행지에서 보는 일출을 좋아하지만 특히 르웨탄의 일출이 그렇게나 아름답다길래 한번 더 기대해 보기로 했다. 일출보다 잠이 더 좋다는 J는 숙소에 두고 혼자 캄캄한 길목을 걸었다. 어제처럼 뭉게구름이 꽉 낀 하늘을 보니 아무래도 해 뜨는 걸 보긴 어려울 것 같아 그냥 잠이나 더 잘까 잠시 고민했다. 그래도 일찍 일어난 게 아까워 계속 호숫가로 걸어갔다.
역시나 동쪽 하늘에도 구름들이 한가득이었다. 그래서인지 호숫가에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별로 없었는데, 그래도 나처럼 일출 보는 걸 좋아하는 동지들이 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혼자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여행객들로 시끌시끌하던 어젯밤과 달리 새벽의 호숫가는 한적하고 고요하고 적막했다. 펜스에 몸을 기대어 진청색의 잔잔한 수면 그리고 그 위를 덮은 회색 구름들과 옅게 낀 안개를 가만히 바라봤다. 포근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이 내 몸을 감쌌다. 낯선 어둠 속에서 여전히 긴장 상태였던 마음이 비로소 편안해졌다. 어디선가 르웨탄을 상징한다는 부엉이가 날아와 내 앞에 호그와트 입학 편지를 떨어뜨리고 갈 것만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도 느껴졌다.
햇님의 출근을 지켜보러 온 사람은 호수 위에도 있었다. 카약이나 패들보드를 타고 일출 보러 나온 여행객들이었다. 호수 위에서 맞이하는 일출은 보트 투어만큼이나 유명한 르웨탄의 체험 프로그램이었다. 나도 해보고 싶었지만 기껏 비싼 돈 냈는데 날이 안 좋아서 해를 못 보면 어쩌나 하고 포기했었다. 혼자하기엔 무섭기도 했고. 그런데 고요한 호숫가를 떠다니는 사람들을 보니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해볼 걸 싶어 후회됐다. 살면서 언제 또 올지 모르는데. 이 넓디 넓은 호수 위에 떠 있는 기분은 어떨까? 정말 부러웠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신 정성껏 호숫가의 아침 풍경을 눈에 담았다. 동쪽 하늘의 남보라색 구름 사이로 태양의 존재를 알리는 주황빛이 비치고 있었다. 구름 너머에 분명 떠 있을 동그란 태양을 상상하니 마음이 따땃해졌다. 천천히 그러나 쉴새없이 흘러가는 구름들을 관찰하는 동안 어둡던 하늘이 점차 밝아지더니 구름이 걷힌 자리에 하늘색이 등장했다. 우리가 아는 그 하늘색이었다. 그리고 더 높은 하늘에는 햇빛을 받아 하얘진 구름이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동그란 태양만큼이나 반가운 신호였다.
역시 혼자라도 해보길 잘했던,
역시 혼자라서 허전했던 르웨탄의 일출이었다.
'과연 내가 진짜 탈 수 있을까?
2층집 옥상에만 올라가도 심장 떨리는 내가...?'
달달 떨리는 손발을 부여잡고 기다리고 있는 것, 바로 케이블카였다.
르웨탄의 절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바로 그 케이블카.
고소공포증이 심한 나에게 케이블카를 탄다는 건 목숨 건 도전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J가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꼭 타고 싶다길래 (울면서) 함께 하기로 했다. 탈거면 후딱 끝냈으면 좋겠는데 사람들은 어찌나 많은지! 과연 르웨탄은 대만 사람들이 사랑하는 여행지였다. 기다리는 동안 자꾸만 도망 치려는 내 두 발을 꽁꽁 붙잡아 두느라 진이 다 빠졌다. 아, 나 말고 J가.
르웨탄의 케이블카는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어 아래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것 그리고 철로 되어 있어 아래를 볼 수 없는 것. 대기 줄은 유리 바닥 버전이 더 길었고(대만 사람들은 다들 용감했다), 우리는 당연히 짧은 줄에서 기다렸다. J는 내심 이왕 온 김에 유리 바닥 타기를 원하는 기색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작은 간땡이로 유리 바닥 탔다간... 송장 돼서 귀국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30분 정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우리를 태워줄 케이블카가 왔다. 밝은 초록색, 왠지 튼튼해 보인다고 생각하며 케이블카에 탑승했다. 한국인 여자 둘과 어느 대만인 가족을 태운 케이블카는 가느다란 줄에 매달린 채 호수를 향해 출발했다. 창 밖의 나무들이 무서움에 팔딱대는 내 심장처럼 커졌다 작아졌다 했다. 그러다 어느새 저 멀리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보트 투어하면서, 일출 기다리면서 원없이 본 르웨탄이지만 이렇게 보니 또 다르게 보였다. 왜 사람들이 이 호수를 아름답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헐 어떡해..... 무서워...."
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거고,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대만 가족이 소리내서 웃었다. 한국어를 몰라도 내 표정을 보고 금방 알아챘을 거다. 이 외국인 완전 쫄아 있다는 걸. 그도 그럴 것이, 케이블카가 생각보다 엄청 높은 곳을 날고 있었다! 일부러 후기 안 찾아보고 타서 그런지 더 무서웠다(알았으면 안 탔겠지).
그래도 인증샷은 남겨야 했다. 그나마 안전한 중간 자리를 벗어나 르웨탄이 보이는 창가로 무거운 궁둥이를 옮겼다. 휴. 한국에 있는 엄마 손 대신 의자 등받이를 꼭 잡은 채 J를 쳐다봤다.
"언니, 조금만 웃어봐요!"
"하하하...."
마스크 껴서 다행이었다.
사진까지 찍고 나니 이제야 바깥 경치가 눈에 들어왔다. 르웨탄이 이렇게 생겼구나. 여전히 호수의 어디가 해이고 어디가 달인지 분간되지 않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르웨탄은 멀리서 볼 때 그 진가가 드러난다는 것.
아, 타길 잘했다. 무서움은 금방 사라지지만 감동은 오래 남으니까.
케이블카, 별거 아니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