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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 원의 행복

사소한 변화가 나를 바꾼다

by 끼미 Sep 28. 2024

예상하지 못했다. 오늘 대자연이 찾아올 줄은. 어쩐지 흰 바지 입고 싶더라. 하필 집이 아닌 밖이었고 왜인지 늘 들고 다니던 생리대도 가방에 없었다. 다행히 이제 시작이라 문제가 생기진 않았지만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집에 갈까 아니면 생리대를 살까.


한 달 전의 나였다면 아마 전자를 선택했을 것이다. 집에 한가득 쌓여 있는 생리대를 생각하면 새로 사는 게 왠지 돈이 아깝기 때문이다. 그거 얼마 한다고 그러냐 싶겠지만 예전의 나는 그 정도로 이상한 절약 강박이 있는 짠순이였다.


하지만 오늘은 돈 아까운 짓을 선택했다. '이상한 짠순이'에서 벗어나는 게 요즘 내 목표인데 이번이야말로 새로운 나로 태어날 기회였다. 마침 며칠 전에 다이소에서 생리대를 판다는 사실을 알았고 근처에 다이소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바로 다이소로 달려가서 생리대를 샀다. 4개 천 원짜리와 10개 2천 원짜리를 두고 고민하다가 2천 원짜리를 샀다. 1개당 가격이 더 쌌기 때문이다. 사람이 한 번에 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응급 처치를 마치고 광화문 광장으로 걸어갔다. 이왕 돈 쓴 김에 밖에 좀 더 있다가 집에 들어가자 싶었다. 시원하게 부는 바람을 맞으니 기분도 상쾌해서 이대로 집에 가기 아쉬웠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금요일 오후의 여유도 오늘이 무슨 요일이든 전혀 상관없는 백수인 나를 붙잡았다.


이순신 장군을 지나 세종대왕님 옆의 널찍한 나무 계단 위에 앉았다. 원래 거기 앉을 생각은 없었지만 거기에서 책 읽는 여자분을 보니 멋있어 보였다. 자리에 앉아 작은 분수 터널을 지나가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며 바람을 느끼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이 말이 튀어나왔다.


"아, 살 것 같다."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또 고장 난 줄 알았던 내 호르몬에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해서인지 아니면 넓디넓은 하늘을 올려다봐서인진 모르겠지만 늘 알 수 없는 뭔가로 막혀 있던 숨통이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글을 써야겠다는 충동이 일어 노트를 꺼냈다가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가방 안에 생리대는 없지만 어제 기록 체험에 갔다가 받은 미니 색연필은 있었다. 똥손 중에 똥손이지만 눈앞에 보이는 대로, 손 가는 대로 그렸다. 역시 엉망진창 그림이지만 이 또한 자유로운 순간이었다.


화가에 빙의해서 열심히 그리고 있는데 갑자기 남쪽에서부터 엄청난 굉음이 다가오더니 뭔가가 하늘에 나타났다. 전투기 떼였다. 곧 국군의 날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폰을 들었는데 뭔가 이상한 움직임이 감지됐다. 본능적으로 사진 대신 동영상 촬영 버튼을 누르자마자 파란 하늘 위에 하얀 낙지 한 마리가 나타났다. 요즘 우주 SF 소설인《프로젝트 헤일메리》를 읽고 있어서인지 외계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낙지든 외계인이든 아무튼 신기했다. 전투기가 날아가는 건 봤어도 그림 그리는 건 처음 봤다. 외계인을 발견하면 이런 기분일까?


하늘에 나타난 하얀 낙지하늘에 나타난 하얀 낙지


행복했다. 만약 2천 원이 아까워서 바로 집에 갔다면 이 해방감도, 전투기 떼의 낙지 그림 선물도 못 받았을 텐데 돈 쓴 보람이 있었다. 그리고 나 자신이 대견했다. 더 이상 이상한 짠순이로 살지 않기로 다짐하고 또 실천하는 내 모습이 기특했다. 남들이 보기엔 '겨우 이걸로?' 싶겠지만 나에겐 '겨우'가 아니니 이럴 때 나를 칭찬해줘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도 사소하지만 중요한, 나를 바꾸기 위한 나와의 약속을 지킬 것이다. 오늘 2천 원의 소비로 만난 '살 것 같은' 기분과 행운의 낙지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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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우리나라의 수호자들 / (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똥손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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