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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꼬 용미 Apr 16. 2024

# 결코 평범하지 않은 미국 생존기

1. 미국동부 메릴랜드에 입성!


  남편이 잘 다니던 회사를 휴직했다. 미국 유학을 가겠다고.  미국 1년 파견근무를 막 마치고 돌아왔을 때였다.  

  남편은 UC리버사이드에서 미국과 협업 연구를 했다. 그곳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대학 후배들을 여럿 만났다. 석사만 하고 취업했던 남편 마음은 급했을 것이다. 틈틈이 토플과 GRE시험을 보고 본격적으로 유학준비를 했다. 후배들의 유학 생활을 보고 아무것도 없던 남편도 유학을 갈 수 있을 것 같았나 보다. 우리 다섯 식구 모두가 함께 말이다.

  남편은 계획했던 UC리버사이드가 아닌 메릴랜드 대학교에 입학허가를 받았다. 박사과정 대학원생으로 입학하면서 학비면제와 생활비를 받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미국동부 메릴랜드 주는 집세부터 달랐다. 우리 예상의 3배였다. 예상하지 못한 물가에 놀라 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저 숨만 쉬고 살았다. 


하지만, 그때가 내 삶에서 가장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떠난 유학길에 다섯 식구가 살아 낸 생존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다. 


미국동부 메릴랜드에 입성!

 

   남편이 회사 다닐 때 미국 UC리버사이드로 1년 파견근무를 나갔다.  나는  영어 한마디 입도 떼지 못했지만, 남편을 따라갔다. 18개월, 47개월 된 두 아들을 데리고.  영어를 잘하는 남편 뒤에 숨어서 1년을 그럭저럭 잘 견뎌냈다. 잘 견뎌냈다는 말에는 “Breathe~. Deep breath~.”라고 간호사가 나를 보며 간절히 말해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내가 미국에서 임신과 출산을 겪어냈다는 걸 포함한다. (종이에 쓰인 영어 단어는 읽어도 진통이 오고 남편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미국 간호사가 와 "숨 쉬어. 깊게 호흡해."라는 본토 영어는 들리지 않았다. 내 머릿속은 하얀 백지장이었다.) 미국에서 셋째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는 결코 예상하지 못했다. 계획에 없던 임신이었다. 인생은 언제나 계획이나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그렇게 넷에서 다섯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메릴랜드대학교 대학원생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우리 다섯 식구는  맡겨둔 차와 짐을 찾기 위해 캘리포니아 LA 외숙모 댁으로 가야 했다. 5년을 계획한 유학이라 공항에는 온 가족이 출동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친정엄마는 손주 입에 인절미를 먹이며 그저 배곯지 않고 잘 먹고 잘 지내다 오기만을 바라는 눈빛을 보냈다. 내 가슴팍에는 10개월 된 막내가 아기 띠에 매달려 있었다. 막내를 안은 채 친정엄마와 포옹을 나눴다. 언니들과 동생의 배웅까지 받고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 우리는 게이트를 통과했다.                     

  그런데 막 비행기에 들어선 큰아들이 배가 아프다고 했다.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승무원들이 달라붙어 응급처치를 해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비행기는 곧 출발하겠다는 멘트를 반복했다. 남편은 아이가 체한 것 같다며 손을 따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의무실 직원은 정당한 의료행위가 아니라며 거부했다. 남편은 모든 걸 책임지겠다고 단호히 말했고 결국 아이의 손끝에 검붉은 피를 보았다. 아이의 얼굴에는 다소 붉은 기기 돌았지만 아이는 힘이 없어 보였다. 승무원과 의무실 직원은 아픈 아이를 비행기에 태웠다가 큰일이 날 수도 있다고 탑승을 만류했다. 나는 그 옆에서 막내를 안고 둘째 아이 손을 붙잡고 서서 발만 동동 굴렀다. 남편은 그런 나를 한 번 쳐다봤고 결단을 내렸다.                    


  남편은 아이 때문에 비행기가 회항할 수 있고 그에 따르는 책임을 묻겠다는 서약서에 사인을 하고 우리는 비행기에 올랐다.(당시에 나는 이런 사정을 알지 못했다. 그때 이런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나는 무엇을 선택했을까) 나는 보채는 아이를 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저 남편의 결단에 따랐다.                


  드디어 비행기는 한국 땅을 내달리며 이륙했다. 그런데 큰아이가 다시 배가 아프단다.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을 여러 번 들락거렸다. 큰아이는 기어코 바지에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아이는 편안해 보였다. 좁은 화장실에서 아이를 씻기고 아픈 아이를 달랬을 남편을 생각하니 지금도 짠하다. 만 세 살 둘째는 

우리 넷과 뚝 떨어져 앉았다. 아픈 형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던 것이다.  모르는 아저씨 옆에서 혼자 조용히 자고 먹고 13시간을 무사히 견뎌 주었다. 막내도 젖을 물고 얌전히 아픈 형과 아빠에게 조용한 위로를 보냈다.                    


  연애시절부터 미국 박사학위를 받고 싶다던 남편이었다. 공부를 맘껏 하고 싶다는 꿈은 녹록지 않았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 때문에 여기저기 과외를 뛰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모아 놓은 것은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며 국비장학금을 따기에도 빠듯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을 품은 사람은 좁고 어두운 골목길에서 유일한 가로등 불빛이 환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아니 보이지 않는 길도 찾아 나서는 것 같다.            


  우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 외숙모에게 맡겨둔 짐과 차를 찾기 위해서였다. 남편은 미니 밴에 

1년 파견 근무에서 썼던 모든 짐들을 실었다. 운전석 하나만 빼고 7인승 미니밴이 그야말로 꽉 차서 터질 지경이었다. 지도책을 보며 길을 찾던 우리였는데, 홀로 떠나는 남편에게 내비게이션을 하나 사서 달아 주었다. 남편은 그렇게 로스앤젤레스에서 메릴랜드로 혼자 떠났다.           


  남편은 차로 3박 4일을 달렸다. 고속도로를 하루 13시간씩 운전했다. 미국 땅이 얼마나 크고 거대한지, 그는 혼자 몸소 체험한 셈이다. 외숙모가 챙겨준 고추장과 고추, 김치와 밥을 씹으며 그저 달렸다고 한다. 처음 보는 사막과 이국적인 풍경에 마음을 빼앗겼을지 모른다.  이내 익숙해진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고 한마디 말도 없이 하루 13시간을 달리다 보면 바깥 풍경은 그저 배경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길과 자신만의 결투 같은 여행이었을 것이다. 다섯 식구 가장이 꿈을 위해 떠난 유학의 여정은 그렇게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남편이 메릴랜드에 도착했다. 그곳에 짐을 풀면 내가 비행기를 타고 아이들과 그곳으로 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우리가 살 아파트는 어디야?”      

  아뿔싸, 깜빡했단다. 전혀 알아보지 않았다. 어느 지역에 살지, 어느 아파트로 들어갈지 우리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렌트 비용만 얼마인지 어림잡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하고 아찔하다. 남편 혼자 무척 막막했으리라. 남편은 메릴랜드대학교 커뮤니티사이트를 뒤져 학교에서 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아파트를 찾아냈다. 혼자서 7층까지 짐을 날랐을 그를 생각하면 뭉클하다. 뭐든 쉬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날 그렇게 바로 아파트를 구해 무사히 들어갔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이번엔 내 차례다. 나는 10개월 된 막내를 슬링으로 안고 등에 배낭을 메고 가방 하나를 들고 만 다섯 살과 세 살 두 아들을 내 옆에 꽉 붙들고 걸었다. 공항까지만 가면 남편이 기다리고 있을 거였다. 사촌 동생들이 공항까지 태워다 주고 수속을 도와줘서 무사히 비행기에 올랐다. 일부러 밤 비행기를 탔다. 아이들이 조용히 잠만 자 주기를 바랐다. 국내선 비행기는 좁았다. 그런 공간에서 나는 슬링을 풀 수도 없었다.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다행히 큰아이들 둘은 쥐 죽은 듯 자기 자리를 지키며 불편한 자세에서 깊은 꿈 속으로 빠져들었다. 간간히 칭얼대는 막내를 위해 가슴을 풀어헤치고 젖을 물렸다. 나도 쪽잠을 자며 습관처럼 막내의 궁둥이를 두드렸다. 우리는 그렇게 다섯 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새벽 메릴랜드에 도착했다.                     


  기어코, 2010년 7월 메릴랜드에 우리가 입성했다. 그날 공기는 건조하고 더웠다. 첫 공기가 내 가슴 깊숙이 들어왔을 때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온전히 내 폐를 활짝 열어젖혔다.        


  호텔 같은 고층 아파트였다. 남편은 프로모션이 걸린 집이라 시세보다 저렴하게 계약했다고 싱글벙글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복도가 긴 호텔 같은 아파트라니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가스레인지며 냉장고 등 가전이 모두 고급스럽고 화장실도 두 개인 럭셔리 아파트였다. 한국 집보다 더 넓고 좋았다. 나는 불안했다.      

  “이 아파트 월세는 얼만데?”     

  뭐라고? UC리버사이드 학생가족 하우스의 거의 3배였다. 우리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생활비를 받는다고 하지만, 집세로 거의 다 내야 하는 거였다. 우리는 뭐 먹고살지? 머릿속 계산기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누가 이렇게 좋은 집을 구하래? 우리 예산을 생각했어야지!”     

 메릴랜드 입성 첫날부터 싸웠다. 집은 최소로 했어야지. 상의 없이 혼자 그렇게 결정할 수가 있느냐고 따졌다. 하지만, 남편은 당일 도착해서 이렇게 좋은 집을 구했는데, 뭐가 문제냐는 거였다. 혼자서 이 집 구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오히려 화를 내냐며 섭섭해했다. 2층짜리 목조 아파트는 층간 소음과 벌레들이 득실대서 너는 하루도 못 견딜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난 그보다 우리의 예산과 살아갈 시간의 그래프만 생각했다. 벌레 따위는 무섭지 않았다. 혼자 자취할 때 손가락만 한 바퀴벌레를 맨 손으로 때려잡던 나였다는 걸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우리 1년 살고 돌아갈 거 아니잖아. 당신 공부 마칠 때까지 버텨야 하잖아!’     

  무수한 말들을 삼켰다. 이미 튀어나온 말들은 주워 담을 수 없으니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까. 낯선 곳에 와서 아이들이 엄마, 아빠의 싸움부터 겪게 해서는 안 되었으니까. 

  결국, 우리는 일 년 살고 더 저렴한 아파트로 이사를 하자고 합의를 봤다. 이미 계약했고 위약금을 물고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체념했다. 그리고 나는 숨만 쉬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우리는 무모했다.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에서는 남편 후배가 사는 아파트 단지로 들어갔었다. 모든 절차를 후배가 알아봐 준 덕에 우리는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몰랐다. 자신이 직접 해 봐야 아는 거다.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수십 번 다니던 길도 내가 혼자 운전을 해서 가자면 길이 생소하다. 손수 발로 뛰고 직접 알고 경험해 봐야 머리에 깊숙이 남고 몸에 배는 거였다.                

 

  한편으로, 실제 살만한 아파트 월세가 그렇게 비싸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유학을 결심할 수 있었을까.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 될 수도 있다. 나라면 낯선 나라에서 당일 아파트를 구해서 들어갈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오금이 저린다. 남편은 참 대단했다. 그를 믿고 우리 가족은 그의 유학길에 동행한 것이었다. 

           


( * 1년을 살고 집을 옮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파트 프로모션 연장으로 유학 5년 동안 우리는 이 아파트 7층에서 살았다. 층간 소음이 거의 없는 아파트였고 이웃들이 참 좋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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