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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꼬 용미 Apr 23. 2024

# 결코 평범하지 않은 미국 생존기

2. First day of School

   

   집 문제로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마음을 추스르고 보니 현실이 보였다. 넓은 아파트에 우리 짐을 풀고 났더니 목소리가 울릴 정도로 텅 비었다. 안방 마스터 룸 끝에서 거실 끝이 일직선인데, 달리기 시합을 해도 될 만큼 길었다. 캘리포니아에서 기어이 끌고 온 오래된 TV와 야외용 의자 두 개가 사막에  버려진 건물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층간 소음 때문에 한국에서 싸들고 온 매트를 안방에 깔고 침대라고 불렀다. 옷가지와 이불은 방마다 딸린 벽장에 정리했다. 그 외 물건들은 일단, 바닥에 놓을 수밖에. 먼저 온 남편이 거의 다 정리를 해놓은 상태였다.      


   메릴랜드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우리에게 시에나가 있었다. 차가 있으면 모든 게 해결이다. 차를 구입하는 것은 정말 골치 아픈 일이었다.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1년 살 때, 시에나를 샀다. 남편은 중고차 사이트를 매일 뒤지고 마음에 드는 차가 있으면 후배 차를 얻어 타고 보러 갔다. 가격이 맞지 않거나 허탕을 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거의 한 달 만에 구입한 시에나를 의기양양하게 끌고 온 그날 우리는 처음으로 가장 크게 싸웠다. 중고차를 타고 오려면 보험도 들어야 하고 워런티(보증기간) 기간 연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남편은 기본 워런티도 아니고 고급 워런티 연장을 사 왔다. 나는 생각했다. 당시 시세로 7년 된 시에나 중고차를 7,000달러에 샀는데, 워런티 연장에 3,000달러를 쓴다고? 1,000달러도 아니고? 이건 아니지 싶었다. 


    "그럴 거면 차를 더 비싼 걸로 사지. 워런티는 보험 같아서 없어지는 돈인데. 이게 말이 돼? 당장 워런티 환불해 와!"

  한국이었다면 내가 가서 바로 환불을 했을 것이다. 아니 계약부터 내가 참여해 계산은 내가 했을 것이다. 이런 일은 처음부터 없었을 거지만, 난 영어를 못하고 아이를 돌봐야 해서 집에 있어야만 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7,000달러는 한국에서 차를 사기 위해 대출받은 돈이었다. 환율까지 올라 7,000달러는 700만 원이 아니라 1,000만 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물러설 수 없었다. 차는 마음에 들었지만, 워런티는 필요 없어 보였으니까. 


  우리는 밤새 싸웠다. 똑같은 말이 오고 갔다. 남편은 멀리까지 차를 사러 다녀왔는데,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는 것에 거의 분노했다. 내 말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여보, 수고했어요." 이 말이 빠져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나는 문제만 보이고 수고한 남편은 보이지 않았던 거였다. 조금 예쁘고 상냥한 말투로 이야기했어야 했다. 난 그때 그 감정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국에서 경제적인 것은 거의 내가 관리했었다. 남편은 숫자나 돈에 약하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돈문제로 싸운 적이 없었는데 우리는 미국에 나오자마자, 생각지도 못한 일들에 부딪혔다. 한참을 싸워도 결론을 내지 못하고 남편은 안방으로 들어가 아이들과 잠을 잤다.


  아마 그날은 결혼기념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내 말이 씨알도 먹히지 않고 벽과 얘기하는 것 같은 마음을 맥주로 달랬다. 하필 결혼기념일일 게 뭐람. 김건모 노래 시디를 들으며 나직이 노래를 따라 부르며 밤늦도록 외로운 밤을 혼자 눈물로 지새웠다.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다음날, 반전이 있었다. 회사 출근을 한 남편이 점심때 잠깐 들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남편 표정은 해맑았다. 함께 연구하는 현지 소장님이 이런 워런티는 필요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거봐. 내 말이 맞잖아!'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분 말 한마디에 남편은 주말에 워런티를 환불하러 가겠다고 했다. 뭔가 빠진 것 같은데? "미안해. 당신 말이 맞았어."라는 남편 말은 끝내 듣지 못했다. 이 말 한 마디면 되는데.... 남편들은 이 작은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 거름이 되는지 알지 못한다. 사랑과 신뢰가 쌓이고 우리 둘 사이, 관계의 나무에 커다란 밑거름이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도 미안했어."

  라는 말을 내 가슴속 우물로 빠뜨려 버렸다.  


  이렇게 슬픈 사연이 우리 시에나에게 전설처럼 덮여 있다. 이 때문에 차를 팔지 않고 지인에게 맡겼고 서부에서 동부까지 모셔온 것이다.



   우리는 한국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고속도로를 타고 30분 거리에 H마트가 있었다. 당장 음식을 해먹을 간장, 고추장, 된장, 액젓 등의 양념류와 배추, 열무, 무, 고춧가루, 파, 마늘, 두부, 맛살, 소주, 새우깡 등 한국인들이 꼭 필요한 것들을 샀다. 리버사이드에서 한번 살아본 경험이 있어서 정착에 대한 준비는 척척 진행되었다.      


   남편이 학교에 볼일을 보러 간 사이 나는 아이들 셋을 데리고 근처 도서관에 갔다. 운전면허가 없던 내가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걸어서 30분 거리에 도서관이 있다고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도서관 옆에는 마을에서 운영하는 마트와 커뮤니티 센터, 수영장 등 마을의 각종 편의시설들이 모여 있었다. 미국에 도착한 다음날이었다. 나는 도서관에 가서 아이들과 나의 도서관 회원증을 만들었다. 영어도 못하는 내가 어떻게 만들 수 있었을까.     


   리버사이드에서 1년 살 때, 남편 후배 부부들이 다섯 쌍쯤 있었다. 그들과 어울리며 1년 내내 영어 한 마디 안 하고 살았다. 남편과 늘 함께여서 영어로 말하는 것은 내 몫이 아니었다. 한국으로 돌아와(유학준비시절) 백일도 안 된 아이와 어린이집에 다니는 두 아이를 양육하면서 늘 집을 지킬 때, 나는 생각했다. 그곳이 미국이었는지 여기가 한국인지 전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게다가 뜻밖의 임신으로 입덧과 싸우면서 운전면허를 딸 기회를 날려 버렸고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를 미국여행의 기회들을 놓쳤구나 싶었다.  아쉬움이 컸다. 그래서 다시 미국에 간다면 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살아야겠다고 힘주어 다짐했었다.      


   나는 도서관 회원 가입을 하고 싶었다. 리버사이드에 있을 때 주위에서 도서관에 가면 좋은 프로그램이 많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뭔가 꿀단지라도 숨겨진 것처럼 나도 그 꿀단지의 맛을 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 마음이면 충분했다. 영어 단어 몇 개와 간단한 문장으로 내 의사 표현을 하고 났더니 원어민 사서들이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과정도 복잡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장황한 설명을 다 이해한 것은 아니었으나 맥락은 알아들었고 모르는 것은 다시 물으면 되었다. 국가 간의 협약서를 쓰는 것도 아니고 일상의 대화이니 만큼 마음은 통하는 법이다. 그때 나도 할 수 있구나! 하면 되는구나! 싶었다.  하겠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First day of School     


   며칠 후, 아파트 입구에서 한국인 아줌마 두 명을 만났다. 나는 달려가 새로 이사 왔다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녀들은 우리 아파트에 한국인 피아노 선생님이 살고 아이들이 레슨을 받고 가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아이들이 어느 학교를 다니는지 물었다. 그리고  내 사정을 털어 놓았다. 처음 본 그분에게 큰아이 학교 라이드를 부탁했다!


   메릴랜드 대학원생 입학식과 큰아이 학교 개학날이 같다고 했다. 그래서 남편은 자기 학교에 가야 해서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운전을 못하고 차는 하나뿐이다. 

  “그럼, 큰아이 학교는 어떻게 가? 첫날은 스쿨버스도 없다면서?” 

  내가 묻는 말에 남편은 대답을 못 했다. 


  남편 때문에 나온 유학이라고 남편학교가 우선이라고 체념했던 것 같다. 머릿속에는 ‘어떡하지?’ 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버스를 타고 가던가, 택시를 부르면 되지 싶지만,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더 기다렸다면 분명 남편은 방법을 제시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학 겨를도 없이 마침 그녀들을 만난 것이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하다. 운도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라는 걸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던 거다. 결국, 내가 아이를 구할 방법을 찾아낸 거였다. 


   내 수준에서의 생존 본능이다. 학교 첫날부터 우왕좌왕하기는 좀 모양이 빠지질 않는가. 그녀들 덕분에 큰아이 ‘First day of School’을 무사히 마쳤다. 게다가 그녀들은  피아노 선생님도 소개해 주었다. 이 또한 신의 한 수였다. 다짐과 용기의 열매였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덕목 중 하나는 단연코 용기다!    

 

   둘째 날부터는 아침마다 노란 스쿨버스가 아파트 앞으로 왔다. 근처 타운하우스에 사는 아이들도 이곳에 모여 함께 스쿨버스에 올랐다. 둘째는 형이 커다란 버스를 타고 떠나자 함께 가겠다고 떼를 쓰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형아 바라기 세 살배기 둘째는 맛있는 걸 먹어도 꼭 형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같이 먹었다. 이제는 고등학생이 되어 입시 속에 푹 담가져 허우적대지만, 마냥 귀엽고 사랑스러울 때가 있었다. 


    "Are you Korean? Do you live this APT?" 

  스쿨버스가 떠나고 동양인 여자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일본인이고 같은 아파트, 7층에 살고 있다고 했다.  머뭇거리며 천천히 들어오는 영어는 이해할 수 있었다. 히사코는 1학년 딸이 있다고 했다. 딸은 우리 큰아이보다 한 살이 많았지만, 미국에서는 그냥 친구다. 우리는 까만 머리색에 서로 동질감을 느끼며 친한 이웃이 되었다. 그리고 곧,  친구가 되었다.    

  



   남편과 큰 아이가 학교에 가면 나는 둘째와 셋째를 유모차에 태우고 도서관으로 갔다. 매주 스토리 타임이 있었다. 자원 봉사자들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노래도 들려주었다. 무료고 선착순으로 표를 나누어 주기 때문에 부지런을 떨어야 했다. 미국인 엄마, 중국인 엄마, 한국인 엄마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책을 읽고 시간을 보내기 좋아 매일 갔던 것 같다. 선뜻 말을 붙이지는 못했지만,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알아지는 것들이 있었다. 영어를 조금만 더 잘했다면 아니 붙임성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다른 나라 사람들이랑 미국 엄마들과 친해질 수 있었을 텐데. 여전히 아쉬운 한계들이 있었다. (이건 지금 와서 하는 이야기다. 당시에는 도서관에 아이들을 풀어놓으면 아이들을 쫓느라 바빴다. “Hello~”, “Hello, pretty~”, “Hello, pumpkin~” 미국엄마들의 버터 발음들이 귀를 녹일 듯 친근했다.)     

 

   한 번은 돌도 안 된 막내가 도서관 의자에서 떨어졌다. 사서 둘이 달려와 영어로 뭐라고 하는데, 난 당황해서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한국인 엄마가 다가와 통역을 해주었다. 911을 부를까 내게 물어본 것이었다. “NO, Thank you!” 나는 강하게 괜찮다고 했다. 미국에서 911을 부르는 것은 공짜가 아니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물론 괜찮았다. 아이들 안전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이라는 생각에 들리지 않는 영어보다 안심이 되었다.      


   남편의 ‘First day of School’은 물어보지 않았다. 편하게 시에나를 타고 간 학교는 편했을까. 아들의 첫날도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성적이고 영어를 못한다고 생각했던 내가 용기를 냈던 그 작은 순간들만이 선명하고 그때의 감정만을 기억할 뿐이다. 

  이것은 내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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