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구입 & 살림장만
메릴랜드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우리에게 시에나가 있었다. 차가 있으면 모든 게 해결이다. 차를 구입하는 것은 정말 골치 아픈 일이었다.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에 1년 살 때, 시에나를 샀다. 남편은 중고차 사이트를 매일 뒤지고 마음에 드는 차가 있으면 후배 차를 얻어 타고 보러 갔다. 가격이 맞지 않거나 허탕을 치는 경우도 있었다. 거의 한 달 만에 구입한 시에나를 의기양양하게 끌고 온 그날 우리는 처음으로 가장 크게 싸웠다.
당시 시세로 7년 된 시에나 중고차를 7,000달러에 샀다. 당연히 보험도 들어야 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워런티를 3,000달러나 주고 샀다고? 1,000달러도 아니고? 이건 아니지 싶었다. 워런티는 중고차의 보증기간을 연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중대한 부품의 교체가 필요할지 또는 해당이 될 지도는 모르는 거고 7년 된 중고차에 무슨 워런티가 필요할까 싶었다.
"그럴 거면 차를 더 비싼 걸로 사지! 워런티는 보험 같아서 없어지는 돈인데. 이게 말이 돼? 당장 워런티 환불해 와!"
한국이었다면 내가 가서 바로 환불했을 것이다. 아니 계약부터 내가 참여해 계산은 내가 했을 것이다. 이런 일은 처음부터 없었을 거지만, 난 영어를 못하고 아이를 돌봐야 해서 집에 있어야만 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7,000달러는 한국에서 차를 사기 위해 대출받은 돈이었다. 환율까지 올라 7,000달러는 700만 원이 아니라 1,000만 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2008년 외환위기 당시, 환율은 1,300원) 물러설 수 없었다. 차는 마음에 들었지만, 워런티는 필요 없어 보였다.
우리는 싸웠다. 똑같은 말이 오고 갔다. 남편은 멀리까지 차를 사러 다녀왔는데,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는 것에 거의 분노했다. 내 말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여보, 수고했어요."
이 말이 빠져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나는 문제만 보이고 수고한 남편은 보이지 않았던 거였다. 조금 더 예쁘고 상냥한 말투로 이야기했어야 했다. 난 그때 그 감정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국에서 경제적인 것은 거의 다 내가 관리했었다. 남편은 숫자나 돈에 약하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돈문제로 싸운 적이 없었는데 우리는 미국에 나오자마자, 생각지도 못한 일들에 부딪혔다. 한참을 싸워도 결론을 내지 못하고 남편은 안방으로 들어가 아이들과 잠을 잤다.
그날은 아마도 결혼기념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내 말이 씨알도 먹히지 않고 벽과 얘기하는 것 같은 마음을 맥주로 달랬다. 하필 결혼기념일일 게 뭐람. 김건모 노래를 듣고 나직이 따라 부르며 밤늦도록 외로운 밤을 혼자 눈물로 지새웠다. 그날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다음날, 반전이 있었다.
회사 출근을 한 남편이 점심때 잠깐 들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남편 표정은 해맑았다. 함께 연구하는 현지 미국인 소장님이 이런 워런티는 필요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거봐. 내 말이 맞잖아!'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분 말 한마디에 남편은 주말에 워런티를 환불하러 가겠다고 했다.
뭔가 빠진 것 같은데?
"미안해. 당신 말이 맞았어."
라는 남편 말은 끝내 듣지 못했다. 이 말 한 마디면 되는데.... 남편들은 이 작은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 거름이 되는지 알지 못한다. 사랑과 신뢰가 쌓이고 우리 둘 사이, 관계의 나무에 커다란 밑거름이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도 미안했어."
라는 말을 내 가슴속 우물로 빠뜨려 버렸다.
이렇게 슬픈 사연이 우리 시에나에게 전설처럼 덮여 있다. 이 때문에 차를 팔지 않고 지인에게 맡겼고 캘리포니아에서 동부까지 모셔온 것이다.
우리는 차가 있으니 바로 장을 보러 갔다. 고속도로를 타고 30분 거리에 H마트(한국마트)가 있었다. 당장 음식을 해먹을 간장, 고추장, 된장, 액젓 등의 양념류와 배추, 무, 고춧가루, 파, 마늘, 두부, 맛살, 새우깡 등 한국인들이 꼭 필요한 것들을 샀다. 리버사이드에서 한번 살아 본 경험이 있어서 정착에 대한 준비는 척척 진행되었다.
캘리포니아에서 기어이 끌고 온 짐들을 풀었는데도 아파트 내부가 텅 비었다. 오래된 TV와 야외용 의자 두 개가 사막에 버려진 건물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층간 소음 때문에 한국에서 싸들고 온 매트를 안방에 깔고 침대라고 불렀다. 옷가지와 이불은 방마다 딸린 벽장에 넣고 그 외 물건들은 바닥에 놓을 수밖에 없었다.
6개월이 지났을 때, 가구라고는 식탁하나가 늘었을 뿐이었다. 그 식탁은 그린벨트에 간지 거의 하루 만에 무료로 얻은 것이었다. 시에나가 있어 가져올 수 있었다. 소파대신 카펫에 요를 하나 깔고 살았다. 미국이지만, 바닥 생활을 한 것이다.
남편이 학교에 가면 2층 동생이 딸을 데리고 올라왔다. 우리 막내와 그녀 딸이 동갑이라 둘은 함께 놀았고 나도 2층 동생과 수다를 떨고 마음을 달랬다. 한 동안 유일한 친구였다.
2층 동생은 영어를 잘하고 외향적이어서 아파트에 누가 들어오고 나가는지 다 알고 있었다. 어느 날엔가 3층 공대박사님 댁이 귀국세일을 한다는 정보를 주고 갔다. 쭈뼛쭈뼛, 용기를 내어 신속히 그 집으로 내려갔다. 3인용 소파를 100달러에, 커다란 책상을 25달러에 사겠다고 찜하고 귀국 전날 가져가겠다고 약속했다.
귀국전날, 그 집에 갔다.
‘내일 귀국하는 거 맞나?’
의심했다.
살림살이들이 거의 그대로 있었다. 아니 모두 바닥에 나와 있었다. 최소 5년 넘게 살았던 살림을 어린아이 한 명을 데리고 언니 혼자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였다. 내가 좀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귀국이사는 이미 했을 것이고 이 많은 것들을 들고 가나 궁금했다.
“이거 다 버려요?”
“응. 스테인리스도 사용기한이 있다고 하던데?”
“그래요? 언니, 버릴 거면 저 주세요.”
나는 모르겠다. 스테인리스 냄비가 사용기한이 있는지 없는지. 큰 냄비, 작은 냄비, 곰 솥, 커다란 볼에다 스테인리스 프라이팬까지 죄다 들고 왔다. 스탠드 조명도 두 개(미국 집에는 부엌과 화장실을 제외하고 형광등 같은 조명이 없다. 모두 스탠드를 사다 꽂아야 한다.)나 얻었다. 그야말로 횡재였다.
우리는 캘리포니아에서 1년을 살았는데 코펠 한 세트를 들고 가 썼다가 그것을 메릴랜드로 들고 와 사용하고 있었다. 코펠은 양은냄비처럼 빨리 끓어 좋지만 코팅이 벗겨져 장기간 사용은 좀 꺼림칙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스테인리스 냄비를 세트로 받아왔으니 산타에게 선물이라도 받은 느낌이 들었다.
기쁜 마음으로 짐 정리를 도와드렸다. 남편도 공항 라이드를 해주겠다고 나섰다. 승용차 두 대가 움직여야 하는 것을 우리 7인승 시에나는 한 대만 출동해도 충분했으니까. 남편은 그들과 공항으로 떠나고 나는 마지막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왔다.
메릴랜드 대학교 한인가족 모임에서 잠깐 만났던 언니였는데 더 일찍 친해졌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귀국하는 박사님이 가장 아쉬운 것은 미국에서 낚시를 한 번도 못 해본 것이라고 하셨단다. 우리는 그분의 아쉬움을 주워 담아 배운 덕분에 사촌오빠와 낚시를 그렇게 하러 다녔는지도 모르겠다.
그곳에서는 정들만하면 사람들이 떠났다. 메릴랜드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자리를 잡아 떠나는 것이라도 이별은 늘 아팠다. 쓰리고 아렸다. 거의 매일 보던 2층 동생이 1년 만에 한국으로 떠난 후, 나는 한참을 헤맸던 것 같다. 오래도록 창문만 바라보던 시간이 꽤 길었다는 것을 그녀는 알까.
이후로도 귀국세일에서 책장이며 신발장 등을 샀다. 5달러, 10달러면 원하는 물건들을 들여올 수 있었고 덤으로 받아오는 것들도 많았다. 아이들을 위해 어항을 큰맘 먹고 샀다. 15달러로 다소 비쌌지만 그것을 통해 얻는 것이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캘리포니아에서 들고 온 작은 볼록 TV는 사촌오빠 덕분에 바꿀 수 있었다. 사촌오빠가 새 TV를 사고 오빠가 쓰던 55인치 평면 TV가 우리 집으로 온 것이다. 당시 평면 TV는 엄청 크고 두껍고 무거웠다. 옮기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워 거절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힘겹게 옮기고 났더니 볼록 TV보다는 나았다. 우리는 그렇게 살림살이들을 갖추어 나갔다.
어느 날, 차고세일(Garage Sale)을 한다는 전단지가 아파트와 전봇대 곳곳에 붙었다. 타운하우스의 차고세일이라고 하니 기대가 되었다. 미국 현지인이 다른 주로 이사를 간다며 가구를 포함해 온 집안 물건들을 뒤집어 내놓았다. 얼핏 보면 중고산(中古山)에 가까운데 잘만 찾으면 보물 찾기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서 아름다운 나무체스와 도자기 그릇 등 여러 가지를 득템해 들고 왔다. 접시 하나가 몇십 센트에서 5달러 사이였다.
차고세일에서 얻은 것 중 최고는 투명한 호박모양 단지다. 그것을 처음 봤을 때,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처럼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가격이 얼마였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흥분해서 데려왔다. 난 호박단지에 대용량 젤리나 과자를 조금씩 담아두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호박단지는 어쩐지 나를 웃게 했다.
이사를 가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한 번씩 묵은 살림들을 내어 놓을 때가 있었다. 아이들이 자라서 더 이상 쓰지 않는 물건들을 팔기도 하고 새것인데 쓰지 않는 것들을 내놓았다.
어떤 사람들은 음식을 만들어 내놓기도 했다. 아는 언니는 빵이나 컵케이크, 쿠키를 구워 팔았다. 그 옆에는 딸들이 어릴 때 썼던 옷가지나 장난감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물건의 주인인 아이들이 애플 사이다나 레몬 에이드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한 컵에 1달러면 맛볼 수 있었다. 어린아이의 손으로 만들어낸 음료는 어린 시절의 나를 생각나게 하는 마법 같은 맛이었다. 소꿉놀이를 하며 그 옆에 함께 서 있는 것처럼.
세일은 주로 토요일 아침에 있다. 소중한 토요일이다. 어린아이의 야무진 손길이 따스한 햇살처럼 눈부시게 빛난다. 달콤한 기억의 조각들이 지금 나를 미소 짓게 만든다.
근처에는 벼룩시장도 있었다. 매주 주말이면 중고물품을 들고 와 활짝 펼쳐 놓았는데, 이들은 상인 같았다. 거기에는 작은 장식품이나 소품, 미니어처 장난감들이 많았다. 큰아들은 토마스와 친구들, 기차를 샀다. 개당 25 센트로 기억한다. 고든과 에드워드, 헨리와 퍼시, 제임스 등…. 아들 친구들을 참 오랜만에 불러 본다. 나는 인형을 2달러에 샀다. 길이가 30-50센티미터 정도 되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인형들이다. 어떤 분은 골프채를 2달러에 사 모았다고 하니 벼룩시장은 그야말로 앤티크 한 보물창고라고 할 수 있다.
앤티크 하니까 생각난다. 외곽으로 멀리 나가면 앤티크 상점들을 볼 수 있다. 정말 오래된 영국, 프랑스 찻잔이나 스푼, 촛대와 펜촉, 시계와 도자기 인형들, 유니크한 스탠드와 고가구, 의자 등이 가득했다. 새것의 반짝거림은 찾을 수 없으나 오랜 시간이 그대로 내려앉아 있는 귀한 물건이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옛날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들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남편이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 우리는 귀국세일을 했을까?
아니, 우리는 귀국세일을 못했다. 그냥 다 주었다. 그곳에서 감사히 쓰고 고스란히 돌려주어야 할 것 같았다. 아니, 우리가 쓰던 물건은 돈을 주고 팔기에 멀쩡한 물건이 아니었다. 중간에 새로 구입한 밥통만 거의 새것이었다( 110 볼트 제품이라 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밥통도 지인에게 무료로 주고 왔다. 한사코 그냥 주었다.
현지의 권사님, 집사님들에게 얻어먹은 밥이 얼마만큼인지 셀 수가 없다. 사랑하는 동생들이 귀국하면서 준 쓸 만한 가구들도 고스란히 사촌오빠와 이웃들에게 넘겨주고 왔다.
하지만, 귀국세일 때 언니에게서 받은 냄비와 볼은 지금도 한국에서 사용하고 있다.
우리 집 안방에는 미국 벼룩시장에서 샀던 그 인형들이 몇 년째 서 있고 내가 쓰는 컴퓨터는 25달러에 산 그 책상 위에 놓여 있다. 그리고 유리 구두 같은 호박단지도 내 부엌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그 투명한 단지는 내 머릿속 추억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가끔 그 호박단지에서 달콤한 추억들을 꺼내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