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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꼬 용미 Jun 29. 2024

「해군병 703기」 수료식

달음산휴양림, 해군병 아들과의 1박2일

  바쁜 탓도 있었지만 모르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훈련병들의 일과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자꾸 그쪽으로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들의 마지막 훈련을 앞두고 해군 훈련병 703기의 3주 차 훈련 영상을 보게 되었다.     

 

  703기 훈련병들은 여럿이서 함께 한 개의 통나무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려도 버거운 통나무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우리 아들들이 거기 있었다. 게다가 총을 들고 포복자세로 흙바닥을 기고 철조망 밑을 등으로 기어 통과하는 모습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해군이라며? 이런 것도 하는 거였어?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아들, 총 들고 바닥도 기고 그러는 거였어? 잘했어?”

  “우리는 아직 안 했어, 다음 주에 할 거야. 4주 차가 제일 빡세. 화생방도 하고 마지막 주는 좀 낫대.”

  주말에 아들과 짧은 통화를 하고 일주일 내내 그 영상들이 내 머릿속을 떠 다녔다. 일주일이 더디게 흘러갔다.     

 

  “아들, 목소리가 왜 그래? 감기 걸렸어? 훈련은 어땠어?”

  감기에 걸린 것이 분명한 아들의 설명을 듣고 다시 한번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열이 39도를 넘어 펄펄 끓었다고 했다. 하필 가장 힘든 훈련을 할 때. 그래도 열외 없이 해냈다고 자랑스럽게 말을 전했다. 

  “아프다고 했어야지!” 

 내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러나 훈련을 빠지면 목표 점수에 도달하지 못해서 안 된다고 했다. 부루펜을 먹으며 버텼다고. 

  “동기들이 많이 배려해 줬어.” 

  그 말에 울컥해서 남편에게 전화기를 넘겼다. 

     

  “사격했어?”

  남편의 첫마디에 나는 참 철없다 생각했고 눈물이 쏙 들어갔다. 그런데 전화기 너머 아들의 목소리가 신이 났다. 

  “사격은 2등을 했고 화생방도 잘 넘겼어.”

  아들의 목소리가 전화기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래? 나는 1등 했는데.”

  남편이 말했다. 그래, 그 말이 하고 싶은 거였군. 나는 아프다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는데 아빠는 사격에서는 자기가 한 수 위라고 뽐내고 있었다.   

   

  둘은 유쾌해 보였다. 부자간의 대화는 모자간의 대화와는 결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아들은 아픈 와중에도 중도 탈락하지 않고 해냈다는 것에 꽤 만족하는 듯 보였다. '해군병 703기 통하라' 밴드에 들어갔더니 소대 안의 모든 아이들이 감기로 몸살을 앓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서로 배려를 해주고 약을 나누어 먹으며 버텼다는 말에 우리 아들들이 다 컸구나 싶어 찡했다. 

     

  드디어 5주 훈련을 마치고 「해군병 703기 수료식」 초대장이 날아왔다.      


  “아들 뭐 먹고 싶어?”

  “LA갈비 어때?”

  “나 LA갈비 안 좋아해.” 

  아들이 뭘 좋아했지? 막 담근 김치만 생각났다. 새 배추김치와 파김치를 담갔다. 거기에 수육을 삶고  뭉티기(육사시미)와 삼겹살, 그리고 샤부샤부를 준비하기고 했다.  

    

  전날, 육수를 만들고 각종 채소와 버섯, 소고기를 준비했다. 월남 쌈은 포기하고 수육도 삶지 못했는데, 새벽 2시가 넘었다. (일을 좀 시작했더니 전업주부 때와는 사정이 달랐다.) 진해로 가려면 새벽 6시에는 출발해야 하는 데 말이다. 5시에 일어나기로 하고 알람을 맞추고 애써 잠을 청했다. 

     

달음산휴양림, 해군병 아들과의 1박 2일   

  

  “일어나.”

  남편이 조심스럽게 날 깨웠다.

  “몇 시야?”

  “5시 반.”

  “알람은? 당신이 껐어?”

  “아니, 당신이 껐잖아.”

  “늦었어. 5시에 깨웠어야지.”

  내가 늦게 일어나 놓고는 괜히 남편에게 투덜투덜했다. 제일 먼저 가져갈 음식들을 꺼내 아이스백에 담았다. 그리고 씻고 얼른 준비를 했더니, 6시 10분. 많이 늦지 않았는데 투덜거린 것이 조금 미안했다. 


  어쨌든 아들 보러 출발!   

   

  입영식 때 한번 와 봤다고 우리는 아이들이 절을 했던 방향의 천막 밑에 자리를 잡았다. 아들이 선 일곱 번째 줄 옆에. 식전 행사로 해군 한 명이 축하 노래를 부르고 703기 훈련 영상이 커다란 TV화면에 나왔다.   

   

  곧 아들을 본다.  

    

  군악대가 우리 앞에 자리를 잡았다. 의장대가 총을 들고 나와 현란한 공연을 했다. 각이 딱 맞고 박자가 한 치의 오차 없이 절묘했다. 이렇게 멋진 공연에, 얼마나 연습을 시켰으면 하고 안쓰럽다는 생각이 배어 나왔다. 곧이어 군악대의 북이 “둥둥둥” 울려 퍼졌다. 북소리는 내 심장을 두드렸다.

 “둥-둥-둥-”     


  아이들이 날 선 칼처럼 한 동작으로 줄을 서서 걸어 나오자, 주책없이 눈물이 흘렀다. 더운 날씨에 아픈 것도 참아가며 5주 동안 열심히 훈련을 받고 바짝 군기가 들어 늠름하게 등장하는 우리의 아들들이 너무나 대견했다. 우리 아들은 어디에 있나 고개를 쭉 빼고 찾아본다. 모두가 내 아들 같았다.


 정모를 옆에 끼고 앞을 바라보며 멋지게 서 있는 우리 아들을 만났다. 

 “잘했다. 우리 아들. 대견하다. 우리 아들.” 

 아들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아들은 꼼짝 않고 있다. 군기가 바짝 들어 “필승, 이병 000.”라고 외친다. 남편이 정모를 씌워주자 아들이 먼저 아빠 품으로 달려들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 든든하고 감격스러웠다.   

    

  아들을 데리고 해군 교육사령부를 나왔다. 우리는 아들이 제일 먹고 싶어 했던 삼겹살을 부산으로 먹으러 갔다.  아들은 가는 내내 동기들과 잘 맞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좋았고 재밌었다고 재잘거렸다. 

  고소한 삼겹살이 구워지는 동안 아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꿈만 같았다. 까무잡잡해진 얼굴 위로 울긋불긋 여드름이 잔뜩 솟아 있었다.      


  다음 날은 비가 온다 해서 아들이 하고 싶다던 낚시를 하러 갔다. 적당한 호수를 찾아 주차하니 아들이 챙겨 온 낚싯대를 들고 풀 섶 사이로 거침없이 내려갔다. 우리 둘은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풀 섶을 따라 들어가지 못해 우리는 반대편으로 돌아가 아들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아들이 낚싯대를 물에 넣자마자 줄이 묵직하게 요동쳤다. 그토록 잡고 싶어 했던 배스가 한 번에 딸려 올라왔다.  

  “와~ 이거 봐. 잡았어!”

  아들의 짧은 낚시 인생에 최고 44cm 배스를 그날 낚아 올렸다. 5주 훈련을 마친 자기를  축하해 주려고 온 것 같단다. 그래 애썼어. 아들이 웃으니 나도 좋았다. 여러 장의 인증 사진을 찍었다. 땡볕에 물고기가 잡힐 것 같지 않았지만 운이 좋았다. 

      

  남편은 기장에 있는 달음산휴양림에 숙소를 잡았다. 나는 새벽부터 일어난 탓에 차에서 잠깐 졸았다. 잠결이지만 차가 심하게 흔들렸고 내 머리가 자꾸 좌석 머리 판을 때린다고 느꼈다.   

   

  달음산휴양림의 숙소는 아기자기했다. 숙소 한가운데 파란색과 하얀색 수국이 활짝 피어 있고 놀러 온 아이들이 걷고 있었다. 아이들을 보니 늘 휴양림으로 가족 여행을 떠났던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큰형을 보러 함께 오면 좋을 텐데, 중고생 두 동생들은 바쁘다. 

      

  남편과 아들은 산책을 나가고 나는 저녁을 준비했다. 휴대용 버너가 없어서 샤부샤부는 소고기와 버섯, 야채를 한꺼번에 넣고 끓였다. 담백한 야채와 고기를 뭉티기 소스에 찍어 먹기로 했다. 늦게 일어나 음식을 꺼내다가 살짝 얼린다고 냉동실에 넣었던 뭉티기와 김치 냉장고에 넣어 둔 파김치를 두고 왔다. 소스만 들고 온 것이다. ㅠㅠ     


  나비박사 아들은 희귀한 나비 애벌레를 찾아 사진을 찍었다고 밝은 얼굴로 돌아왔다. 우리는 뭉티기와 파김치 없이 샤부샤부와 막 담근 배추김치로 소박한 저녁을 먹었다. 아들과 오랜만에 한잔하고 싶었는데 아들은 동기 훈련병들과 부산에서 만나기로 했단다. 아들이 운전대를 잡고 롤러코스터 마냥 경사가 급하고 급커브가 많은 길을 내려갔다. 나는 숨을 꽉 참고 눈을 감아야 했다. 아까 머리를 콩콩 찧은 이유를 알았다. 

   

  부산 서면에 아들을 내려놓고 차를 주차한 다음 우리는 걸었다. 그야말로 핫한 젊음의 거리였다. 술집들이 즐비하고 예쁜 선물가게와 사진 찍는 가게가 많았다. 우리 때와는 문화 자체가 달라 보였다. 선뜻 어디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우리는 계속 걸었다. 어리둥절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내가 여기서 나이가 제일 많은 것 같아.”

  남편이 몇 번이고 똑같은 말을 했다.

  “우리가 그런 나이지. 뭐든 할 수 있는 젊음이 제일 부럽다.”  

  내가 말했다. 

  

  아들은 더 있고 싶어 했지만 내일을 위해, 숙소가 너무 멀어서 그곳에서 일어나 나왔다. 다시 롤러코스터 길을 타고 숙소로 갔다. 그때까지도 몰랐다. 아들이 5kg이나 빠졌다는 말을 듣고서야 아들 얼굴이 홀쭉해진 것을 알았다. 입주위에 주름이 갈 정도였다. 일부러 탄수화물을 줄이고 몸을 만들고 싶었다는데, 내가 먼저 알아차리지 못해 많이 미안했다.    

  

  다음날 아침. 아침부터 삼겹살을 굽고 김치찌개를 끓였다. 아들을 더 재우고 싶었지만 퇴실 시간이 있었고 아까운 시간을 그냥 흘려버릴 수도 없었다. 길게 누워 자는 아들 곁으로 가 누웠다. 그 작은 아이가 이렇게 커서 단단해지고 세상 밖으로 나가 애쓰고 있다는 것이 그저 안쓰러웠다. 아기 때 몸을 만지며 주물러 주었듯 나는 기다란 아기를 등부터 다리까지 만져주었다. 꾹꾹 눌러 피곤이 풀어지도록. 말캉했던 아기가 아니었다. 단단한 근육이 골격을 꽉 붙잡고 있었다. 아들이 꿈틀거리며 눈을 떴다. 

 

  아들 입에 밥 들어가는 것 만 보아도 배가 불렀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롤러코스터 길을 내려와 창원에 바다가 보이는 카페로 갔다. 해군 교육사령부 옆에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고 해서. 훈련병 생활에 커피가 빠져 아쉬웠다고 했다. 아들은 카페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커피와 빵을 찍고 공유했다. 요즘 아이들의 놀이인가 보다. 나는 책을 펼쳤고 오랜만에 앉아 여유를 즐겼다. 어떤 대화도 필요하지 않았다. 아들이 조용하게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저녁을 먹고 복귀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마트에 들러 필요한 물건들을 샀다. 깔창 3개, 지퍼백, 물통, 탈취제, 치약, 감기약, 렌즈, 인공눈물 등. 후반기 훈련이 또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반기 훈련만큼 힘들지는 않다고 했다. 저녁을 먹기에 이른 시간이었다. 남편이 고르고 고른 식당에 갔는데, 브레이크 타임이라 그냥 나왔다.  


  시각은 4시 45분. 복귀는 6시까지. 아들은 치킨 대신 치킨 버거를 먹겠다고 했다. 버거 집은 한가했고 우리뿐이었다. 그런데 15분이 지나도록 음식이 나오지 않았다. 5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독촉을 하자 그제야 음식이 나왔다. 단체주문이 있어서 우리 주문이 밀린 모양이었다.    

  

  “5시 30분까지 가야 하는데, 5시 30분에 정문이 닫힌다고 했어.”

  “6시 아니야? 빨리 먹고 가자.” 

  허겁지겁 음식을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차에 타 내비를 찍어보니 15분 거리란다. 시각은 5시 15분. 늦겠다. 아들이 좌회전!이라고 외쳤는데 남편은 우회전을 했다. 허둥대다 다시 들어선 길에는 차가 쭉 서 있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는데 말이다. 신호까지 짧다. 가슴이 타들어 갔다. 복귀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탈영으로 간주한다는 글귀를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야, 5시 30분이라고 미리 말했어야지! 난 바로 옆인 줄 알았는데, 당신은 이렇게 멀리 왔으면 거리를 생각했어야지.” 

  마음이 다급해지자 원망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들은 좌회전만 잘했어도라고 했고 남편은 아무것도 도움이 안 되니 조용히 해달란다. 우리 셋은 멘붕으로 차 안 분위기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내 머릿속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늦으면 탈영이라고! 역주행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했고 전화기를 꺼내 112를 눌렀지만(도움을 받아볼 생각으로), 차마 통화버튼은 누르지 못했다.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아들은 뒷좌석에서 비옷을 챙겨 입었다. 나는 휴대폰 내비를 켜고 더 빠른 길로 유도했다. 그래도 늦었다.  

    

  겨우 해군 교육사령부 앞 도로에 진입했다. 시각은 5시 35분. 길이 꽉 막혔다. 그런데 다른 훈련병들이 많이 보였다. 심지어 그들은 느긋했다. 차에서 내려 비옷을 챙겨 입고 천천히 걸었다. 조금 안심이 되었다.  차는 꼼짝도 안 했다. 

  “아들 내려!”

  나는 비옷을 입은 아들을 데리고 인도로 뛰었다. 100미터인지 200미터인지 모르겠다. 걸어가는 부모들과 훈련병 사이를 뚫고 우리는 뛰었다. 5시 30분, 정문이 닫힌다는 그 말만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그걸 모르나? 의아했지만 정문까지 비를 흠뻑 맞으며 뛰었다. 커다란 정문은 닫혀 있고 옆에 쪽문으로 훈련병들이 들어가고 있었다.  쪽문이 있었다. 

    

  휴!~ 그들을 보고서야 안심했다. 

  “아들, 잘 들어가. 몸 관리 잘하고. 사랑해.”

  나는 비에 젖은 손으로 아들 손을 잡았다. 아들은 손을 조용히 빼고 쪽문으로 들어갔다.    

  

  아들은 후반기 훈련에 새로 배치된 후에, 아들과 통화가 되었다.  5시 30분이라고 말한 사람은 친구라고 했다. 교관님이 그랬다고. 미리미리 늦지 않게 오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진짜 넓은 정문은 닫혀 있었다. 처음에는 그 문이 열려 있었는지 난 잘 모른다. 쪽문은 생각도 못했다. 어쨌든 그때는 놀라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아들과 빗속을 뛰던 그 장면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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