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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 원으로  미국 유학이 가능했던 이유

by 꼬꼬 용미 Feb 1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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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돕겠다고 막내가 시리얼이 든 봉지를 들고 신나서 뛰어온다.


복덩이!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로 일 년 파견근무를 나갔을 때, 무계획으로 얻은 막내가 커서 엄마랑 장을 보러 다녔다. 첫째와 둘째는 학교에 가고 우리 둘은 마트를 돌면서 장을 봤다.

"So cute~",

"Adorable~"

카트 안에서 잠이 든 막내를 보고 미국 할머니들이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난리다. 데리고 다닐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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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장보러 갔다 가트에서 잠든 복덩이 막내~



    

미국 메릴랜드로 남편 유학을 떠나면서 1,000원만 들고 갔다.

     

지금은 2025년, 벌써 15년 전 이야기다. 첫 번째 브런치북 <결코 평범하지 않은 미국 생존기>에서 밝혔듯 100달러 장 봐서 3주 버티기, 매일 도서관 가기, 워싱턴 D.C. 의 무료 스미소니언 박물관 가기, NO 외식, 남편 도시락 싸기 등… 그렇게 첫해, 다섯 식구가 1년을 버텼다.

     

그다음은?     


사실, 휴직한 남편 회사에서 3년 동안 기본급이 나왔다. 유학 휴직한 직원들에게 지원해 주는 것이었다. 석사 연구직 직원이 박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겠다니 밀어주는 것이다. 사실, 믿는 구석은 이것뿐이었다.  

    

가지고 간 돈이 거의 다 바닥을 드러냈을 때, 미국에서 세금 신고를 해야 했다. 아파트 앞에서 처음 만났던 한국인을 통해 세무사를 소개받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에게 한국 사람들의 네트워크와 정보는 큰 힘이 되었다.    

  

얼마 후, 연말정산이 끝나고 세금 환급을 선물처럼 받았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받아본 적 없었는데 말이다. 가장이 학생이니 우리는 자동 저소득층에 포함된 것이겠지만, 우리 사정을 생각해 준 것 같아 무척 감사했다.      

게다가 미국으로 1년 파견근무를 나갔을 때, 낳은 셋째(시민권자)에게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보조금(?) 비슷한 지원금을 주었다. 남편 계좌로 얼마가 들어왔는지 정확히 모른다. F2비자(학생부인비자)를 받은 나는 당시에 통장하나 신용카드 하나 내 이름으로 만들지 못해 금융 등 모든 것을 남편에게 의지해야 했다. 어쨌거나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었다. 그래서 이것저것 박박 모으니 매년 화수분처럼 1,000만 원이 다시 채워졌다.

    

처음 왔을 때처럼 나는 열심히 음식을 만들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조하고 남편은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면 되었다. 역시 마음이 있다면 길은 열려 있었다. 그래서 연애 시절 막연히 미국 유학을 꿈꾸었던 남자와 그것을 굳게 믿었던 여자가 만나 우리의 역사를 또박또박 써 내려갈 수 있었다.

    

그러나 회사의 기본급 지원이 끝난 3년 후부터 우리의 믿는 구석이 없어지자, 남편이 일을 더 해야 했다. 퇴근 후, 여가 시간에 번역 알바를 했다. 남편은 어떻게든 생활비를 벌었고 나는 그 안에서 아끼고 저축했다. 그래서 캠핑을 갈 수 있었고 여행도 갈 수도 있었다.  

   

내가 돈을 벌면 어땠을까?


정말 그러고 싶었다. 직장에 나가면 안 되던 영어도 입이 트일 것 같았다. 도서관에서 호텔에서 일하는 취업영어 CD를 빌려다 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F2비자로 합법적인 일을 할 수 없었다. 언어도 되지 않는 타국에서 법을 지키는 것은 당연하고 불법취업으로 추방당하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또한 아이들이 어려서 밖에서 일을 하기보다 집에서 아이들을 잘 돌보는 것이 돈 버는 일이라고 체념했다. 베이비시터 비용이 매우 비쌌기 때문이다.

               

첫째를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점심은 학교급식을 신청하거나 도시락을 싸서 다닐 수 있다. 학교급식 신청서를 쓰면서 남편의 수입을 적었는데, 아이들은 무료급식이 가능했다. 세끼 중 한 끼를 무료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혜택이었다. 5년 동안 아이들 도시락을 싸지 않아 큰 수고로움을 덜었다. 아이들도 식성이 까다롭지 않아 무난히 받아들였다.

     

가끔 소풍이나 체험학습 때, 김밥이나 샌드위치를 싸 보냈다. 처음에는 무조건 김밥을 싸서 보냈다. 하지만, 둘째는 남들과 다른 도시락에 신경 쓰였던지 늘 샌드위치나 햄버거를 원했다. 남편과 아이들 도시락 덕분에 여러 가지 샌드위치 만드는 법을 배웠다. 특히 피넛버터 앤 젤리 샌드위치는 둘째가 가장 좋아하고 간편한 샌드위치다. 식빵 한쪽에는 땅콩버터를, 다른 한쪽에는 (딸기, 포도..)잼을 발라 붙이면 끝이다. 양이 작아 보이지만 초등 아이들에게는 충분했고 매우 간단해서 종종 집에서도 간식으로 먹었다.   

   

우리 첫째는 미국식 학교급식을 5년간 경험한 셈이다. 지금은 한식을 더 좋아한다. 따끈한 국과 반찬, 얼큰하고 구수하면서도 개운한 맛의 다양한 찌개를 사랑한다.

     

미국은 음식에 대한 다양한 알레르기 때문에 학교급식을 매우 엄격하게 관리했다. 특히 땅콩 알레르기가 있는 아이들은 따로 앉게 했다. 그리고 글루텐 프리 음식(밀, 보리, 호밀, 귀리 등에서 볼 수 있는 단백질 혼합물인 글루텐이 제외된 식품)만 먹어야 하는 학생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 생일 때, 컵케이크를 학교에 보낼 수 있다. 하지만 엄마가 만든 컵케이크는 보낼 수 없다. 무엇이 얼마만큼 들어갔는지 성분이 부정확하기 때문이다. 컵케이크를 사서 학교 점심시간 때 배달 가면 글루텐 프리만 먹을 수 있는 아이들은 내가 가져간 컵케이크를 먹지 못했다. 조금 미안했다.  


학교 점심 시간에 보낸 생일 컵케이크학교 점심 시간에 보낸 생일 컵케이크

   

그리고 난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교육도 시켰다.     

“여기서는 네가 먹고 있던 스낵(간식)을 친구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먹으라고 주면 안 돼. 네 과자는 네 거, 친구 과자는 친구 거!

한국에서는 작은 것도 친구들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미국에서는 아이들에게 함부로 음식을 권하거나 줄 수 없었다.


우리는 WIC 프로그램도 이용했다.


영주권을 받기 위해서는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렸지만,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우리에게는 고민할 이유는 없었다.  WIC은 임산부와 성장기 5세 이하 아이들에게 분유와 우유와 곡물, 콩, 채소 등을 바우처로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한 달에 17-30달러 정도로, 품목은 각자 필요한 것을 고를 수 있었다. 두 아이가 해당되어 우리는 한 달에 50달러 정도 지원받은 느낌이었다. 치즈, 빵, 시리얼, 우유, 야채, 과일 등. 다섯 가지 영양소를 골고루 구입하도록 품목이 정해져 있다. 음식의 성분과 용량에 따라 살 수 있는 것과 살 수 없는 것들이 구분된다. 그 규정이 꽤 까다로워서 처음에는 계산대 앞에서 "이건 살 수 없어요."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그러면 나는 다시 진열대로 뛰어가 다른 것을 가져오고 왔다 갔다 진땀을 뺐다.

     

지금 다시 보니 살 수 있는 품목이 더 다양했었나 보다. 나는 살 수 있는 품목을 알게 된 다음부터는 익숙해진 품목들만 골라 담았다. 빵, 콩, 우유, 시리얼 등. 나중에는 빵 대신 토르티야, 마른 콩 대신 조리된 통조림 콩, 한국마트에서 감자 등 채소를 사는 요령이 생겨 꽤 유용했다. 어린 막내 덕분에 거의 5년 내내 시리얼과 우유와 과일 주스는 공짜로 먹었다.  

    

윅(WIC)은 센터에 가서 서류를 제출하고 심사를 받아야 한다. 가족 수와 수입을 따져 해당이 되는지를 먼저 체크하고 주기적으로 바우처를 받았다. 일정 기간 몇 번의 영양교육을 받아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막 모유를 떼고 우유를 먹기 시작했던 막내에게 윅에서  받은 시리얼은 달콤한 간식이었다. 양이 많아 무방비로 마구 먹은 덕분에 (몇 달 만에) 앞니 네 개가 모두 썩어 버렸다. 충치 관리에 주의가 필요하다. 치과를 오가며 충치를 때우면 떨어지고 때우면 떨어지고, 막내는 눈물 콧물 다 짜내고 결국 충치 때우기를 포기했다. 영구치가 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뭐든 장점과 단점은 있는 것 같다.  



시리얼 봉지를 날라 주고 앞니 네 개가 썩어 고생한 막내가 이번에 중학교를 졸업했다.

시간은 흘러 가도 추억은 남는다.



  

https://health.maryland.gov/phpa/wic/Pages/wic-formslist.as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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