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그렇게 살지 않겠어!
하고 싶은 것은 하면서 살겠어!
내 안에서 불뚝불뚝 억울함들이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민주주의가 통째로 흔들리고 즐겁게 가족여행을 떠난 사람들이 불의의 사고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비현실적인 현실 앞에서 나는 흔들리고 있었다. 무력했다.
꽤 오랫동안.
나이 앞자리가 바뀔 위기 앞에서, 뒤돌아 서서 자꾸만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게 된다. 커다란 눈망울의 소가 끔벅끔벅 거리며 억지로 끌려가는 느낌이다.
누가 그렇게 살래?
그래.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 주어진 상황에 보고 배운 대로 살았더랬어. 우리 엄마 아빠가 보여준 삶대로.....
그들은 성실했다. 사 남매를 거둬 먹이느라 한 눈 한번 팔지 않았다.
엄마는 얼음을 깨고 손빨래해서 동태처럼 꽝꽝 얼은 빨래를 아랫목에서 녹여가며, 연탄불 꺼뜨리지 않으려고 밤새 노심초사하고 곤로에 냄비밥 해 먹이며..... 우리를 그렇게 키웠다.
아빠는 건물을 지어 올리며 온종일 먼지를 뒤집어쓰고 여름 내내 땀띠를 등에 얹고 물방개처럼 자식을 업어 키웠다.
나도 결혼해 둥지를 틀고 그렇게 살았어. 엄마처럼 아빠처럼....
남편 덕분에 더 넓은 세상(미국)을 보고 듣고 맛보고 살았지만.
나는 어느새 나이 든 중년의 어른이 되어 버렸다.
시간 참 빨라.
'내게 남은 것은 세 아들과 남편뿐이야. 꿈도 잊은 지 오래요.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아득해 떠오르지 않아. 해야 할 일들은 가벼워졌지만 좋다기보다 허무했어. 무얼 해야 할지 난 모르겠거든.'
남는 시간과 자유 속에서 난 당황스러웠다. 아이 젖을 빨릴 때는 실컷 자는 게 꿈이었는데.... 이젠 남아도는 것이 시간인데, 지금은 자는 내가 벌레 같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무엇을 하면 행복할까?
쉽게 떠오르지 않아 더 괴롭기만 했다. 내가 투명해져서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까지 했다.
문득 옆에 있는 남편이 눈에 들어왔다. 멋지고 근사했던 40대를 넘어 한 발짝 먼저 앞자리가 바뀐 남편이 옆에 계속 있었는데.... 잊고 있었다. 누가 그랬다.
"아이가 대학에 가면 그동안 소홀했던 남편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거야."
늘 옆에 있던 남편이 이제야 보이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보풀이 잔뜩 덮인 코트가 그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도 참 애쓰고 살았구나. 젊고 싱싱했던 청춘을 불태우며 숯이 되어가고 있구나.'
(미안했다.)
갑자기 백화점에서 새 코트를 하나 사주겠다고 했더니,
“난 안 필요해. 자기 사고 싶은 거 사.”
고집스럽게 버틴다.
“당신 올해(2024년)도 고생 많았어. 내가 번 돈으로 사주고 싶어.”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처음 시작해서 돈을 좀 벌었으니, 선물로 꼭 사주고 싶다고 했다. 아주 간절히.
그러나 여전히 굳은 표정의 그. 남편이 높은 벽처럼 느껴졌다. 쇼핑백을 가득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속에서 난 홍당무가 되어 서 있었다. 남편과 보이지 않는 실랑이를 하면서. 그날따라 나도 꺾이고 싶지 않았다. 코트 하나만 사려고 했다가 세일을 해서 양복 한 벌까지 기어이 사버렸다. 수선을 맡기고 주문을 넣고 돌아오는 길에 내가 말했다.
“당신은 충분히 받을 만 해. 이제 우리도 좀 쓰면서 살자.”
그런데,
“겉모습이 뭐가 중요해. 난 안 사도 된다고."
쇠심줄 같은 고집은... 숨이 막혔다. 그렇게 아끼고만 살았던 우리가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소처럼 일만 하고 살 거라는 건가, 더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아직 가르쳐야 할 아이들이 셋이라도 이제는 그렇게만 살기 싫었다. 용암처럼 부글부글 마음이 끓어올랐다.
결국, 집에 와서 눈물을 쏟았다. 남편이 불쌍해서 내가 가여워서..... 잡히지 않는 행복이 야속해서...
자식만 남편만 바라보며 꿈도 없이 살았던 내 과거가 바보 같아서.... 열심히 살았지만, 내가 걸어온 그 길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것 같아서.
까치설날 전날에, 나만 친정에 갔다. (남편은 시댁으로...)
오랜만에 작은 언니와 아빠랑 함께 고스톱을 쳤다. 직장암수술을 잘 이겨낸 아빠를 위해 우린 고스톱판을 벌인 것이다. 아빠가 좋아하고 잘하는 바둑은 너무 어려워도 우리랑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놀이가 고스톱이기 때문이다. 공부를 했어야 할 아빠였다. '인내해라.' 어릴 때, 아빠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다. 어쩌면 그 말은 아빠 자신에게 했던 말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아따 시방 내가 돈을 얼마나 잃어다냐? 그래도 괜찮다잉~ 우리 아빠 도파민 팍팍 나오게!! 내가 오늘 확실하게 효도해 불라니까~"
돈을 잃은 언니가 말했다.
찰싹찰싹 화투장 치는 소리가 경쾌했다. 좋다~ 긍정적인 생각~
아빠 얼굴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남편과 다투고 어둡고 무거웠던 내 머릿속이 한결 가볍고 개운해졌다. 오고 가는 대화 속에 감정이 사그라들고 쌓인 체증이 눈 녹듯 사라지며 온몸으로 졸졸졸 맑은 시냇물이 흘렀다.
"엄마, 내일 새벽에 목욕탕 가자~"
"난 음식 장만하려고 미리 갔다 왔지."
엄마랑 같이 목욕탕에 가기로 해놓고 고등학생이 둘이라 친정도 시댁도 못 간다고 했었다가, 느닷없이 친정집으로 와버린 내 탓이다.
만두피까지 직접 밀어 만든 김치 왕만두를 엄마에게 가족들에게 먹이고 싶었다. 아빠가 무척 보고 싶었다.
대중목욕탕! 여느 때 같았으면 혼자는 포기했을 텐데...
다음날 새벽, 까치설날에 오래된 근처 목욕탕에 갔다. 골목에는 새 하얀 눈이 날리고 있었다.
7,000원. 현금만 된단다.
엄마랑 새벽 4시(?), 5시(?)에 일어나 일요일마다 목욕탕에 다니던 한때가 떠올랐다.
요금은 1,500원(?) 2,500원(?) 아닌가? 잘 모르겠다. 언제 적 이야기인가.
아주 오래전 서울에서 자취할 때, 혼자 목욕탕을 갔던 생각도 났다. 서울에는 등을 밀어주는 동그란 기계도 있다고 신기해했으나 그 돈도 아끼느라 혼자서 긴 때타월로 밀고 나온 게 마지막이었을까?
곰팡이가 곳곳에 자리 잡은 오래된 내부. 낡은 사물함. 거의 40년 만에 간 고향집 근처 대중목욕탕은 그렇게 그대로 있었다. 감격스러웠다.
개인 대야와 앉은뱅이 의자를 들고 와 자리를 잡고 오래전 추억의 장소를 눈으로 어루만졌다. 아주 천천히. 커다란 자두맛 사탕을 아껴 녹여 먹듯이.
비누칠을 하고 깨끗이 헹군 다음, 온탕으로 들어갔다.
늘어질 때로 늘어진 젖무덤이 튀어나온 배꾸리에 닿을 듯한 할머니가 보였다. 얼굴에 갈색팩을 바르고 온몸에도 펴 바르면서 마사지도 하신다. 부항을 부치고 돌아다니는 어르신도 있고, 앉았다 섰다 운동을 하는 분도 있었다. 저마나 자신을 가꾸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동안 난 뭘 하고 있었지? 한 방 크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뜨거운 사우나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도 한 무리의 여자 어른들이 있었다. 이미 알고 지내는 사이 같았다. 홀딱 벗고 수건 한 장씩 걸치고는 이 얘기 저 얘기 수다를 나눈다. 이번 명절에는 무슨 음식을 할 건지, 어느 식당이 맛있고 시집장가 간 딸, 아들, 며느리, 사위가 오는지 안 오는지 정겨운 대화가 오고 갔다.
사우나 안이 열기로 뜨겁다. 이야기 도중에 한 분이 작은 바가지에 찬물을 담아 내게 슬쩍 건네주고 물이 떨어지면 다시 채워 주신다.(얼굴에 끼얹으라고.) 포근했다. 따뜻했다. 뜨거웠다.
덕분에 한참을 버티고 나와 땀을 헹구고 냉탕에 들어갔다. 속이 다 시원하다. 너무 좋아서. 다시 온탕, 다시 사우나, 다시 냉탕....
어른들의 수다를 더 엿듣고 싶어 다시 사우나 안으로 들어갔으나 음식 장만해야 한다고 하나둘씩 자리를 뜨셨다.
아차차, 우리 집도 전 부쳐야지.....
목욕탕 밖으로 나왔다.
며칠 연락이 없던 남편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친정으로 오겠다고. 같이 올라가자고.
솜처럼 따뜻한 함박눈이 내렸고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눈을 온몸으로 맞았다. 시원하다. 행복하다. 따뜻하다. 좋다.
눈을 맞으며 아주 천천히 친정집을 향해 걸어갔다.
참 소박하다.
하지만, 행복했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대중목욕탕에 가 온기를 느껴야겠다.
보고 싶을 때는 부모님 보러 와야겠다.
하고 싶은 것은 하면서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