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라는 단어…
기적 같은 일이었다.
“와~ 25년 만에 엄마 꿈을 이룬 거네. 대단해! 내 친구들에게 우리 엄마 선생님 됐다고 엄청 자랑했어요~”
작년 이맘때 배시시 웃던 큰아들 얼굴이 생각난다. 정식 선생님이 된 것도 아니고 기초학력 강사가 되었다고 큰아들이 이렇게 띄워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내 꿈을 알아주고 의미를 부여해 줘서 잠시 어깨가 으쓱했다.
나는 교사라는 직업을 갖고 싶은 건지, ‘선생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은 건지. 나도 나를 잘 몰랐다.
그러나 기초학력 강사로 8개월간 일을 하면서 알았다.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었다는 것을. 선생님이라는 소리가 듣고 싶고 교사라는 번듯한 타이틀을 갖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똥말똥한 눈동자를 가진 아이들을 만나고 아이들이 원하고 필요한 것들을 찾아 가르쳐 주고 도움을 주고 싶었다는 것을.
2015년에 한국에 왔을 때의 일이다. 6년을 미국에서 살다 와서 뭔가 어리바리하고 주춤주춤 할 때였다. 구청에서 서류를 떼려고 줄을 섰다. 앞사람이 볼일을 보고 나가자, 나는 투명한 칸막이 앞으로 다가갔다. 구청 공무원이 말했다.
“선생님, 무슨 일로 오셨어요?”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선생님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내게 말한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선생님! 무슨 일로 오셨냐고요?”
“저요?”
몇 년 전까지는 민원인(?), 고객님(?)이라고 부르거나 이름이나 번호로 불렀던 것 같은데….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관공서나 은행 등 어딜 가나 나보고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그리 쉽게 부르는 것이 못내 아쉬웠고 섭섭했다.
나는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이다. 두 언니는 집안 형편상 상고를 갔고(은행원이 되라고) 셋째인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학입시에 대해 누구 하나 관심을 갖은 사람이 없었고 나조차도 잘 몰랐다. 막연히 선생님이 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성적도 나쁘지 않아 무난히 선생님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대학수학능력시험이라는 입시제도가 고1 때 생겼다. 여러 해 학력고사로 다져지고 학력고사에 맞추어 키워졌던 나는, 96학년도 수능에서 망했다. 역대급 불수능이었다. 1교시 언어능력부터 너무 어려워 멘붕이 되었다. 나는 평소보다 점수가 많이 안 나왔다. 그러나 갑자기 성적이 월등히 뛰어오른 친구가 있었다. 걔는 수업 시간마다 소설책을 읽던 유쾌한 아이였는데 성적이 스프링을 단 것처럼 튀어 올랐다.(공부보다 책을 읽었어야 했다.)
수능 당일, 교문 앞에서 끓여준 믹스커피 한잔을 끝내 받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소심한 I) 전날 밤새 잠을 못 잤다. 역대 대통령들이 차례로 꿈에 등장해 나를 놀라게 했고 깜짝깜짝 경기를 일으키며 깨서 시계를 확인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공부가 덜 된 것이다. 얼마나 준비가 안 되었고 긴장을 했으면…. 수학능력시험은 단순하게 성실하게 외우고 푸는 문제들이 아니었다.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사고하고 추론하고 융합해서 풀어내야 했다. 난 수능에 적응하지 못했다.
고3 담임이 말했다.
“00 사립대 사범대는 아무 과나 써도 붙겠다. 어디 쓸래?”
“아빠가 사립대는 비싸다고 안 된대요.”
내 꿈은 물어보지도 않고 사립대와 재수는 꿈도 꾸지 말라는 아빠의 엄포에 순둥순둥 모범생이던 나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점수에 맞춰 국립대만 고집해 썼다가 다 떨어지고 후기도 포기하고 난 전문대를 선택했다. 꿈은 멀어졌다. 12년 동안 공부한 것이 수능 날, 단 하루로 결정이 난다는 것이 많이 억울했다.
담임은 내 꿈에 대해 알았을까? 공부 잘하고 성실하니까 선생님이 되고 싶으면 사립대 가서 장학금을 받거나 아르바이트해서 다니면 된다고 한마디만 해 주셨다면 어땠을까…. 아무것도 몰랐던 내 탓이지만 상담이란 것을 제대로 해본 기억이 없다.....
‘꿈이 아니면 돈을 택하겠어!’
단순한 생각과 별 고민 없이 과를 결정했다. 옆에 있던 큰언니가 거기 가면 선생님 소리 듣고 월급도 많다고 했다. 언니도 친한 친구 하나의 데이터를 가지고 날 대학에 보냈다. 사실 무엇을 배우는 과인지도 모르고 그냥 들어갔다.
상고 졸업하고 대학 공부를 위해 들어온 언니, 지방 방송국에서 기자로 일하다 들어온 언니, 전업주부였다가 40 넘어 공부를 시작한 왕언니, 직장을 그만두고 들어온 가장 40대 큰오빠, 공부는 하기 싫어서 재수 삼수 끝에 들어온 오빠, 서울대 미대 떨어지고 들어온 언니, 타지방 소도시에서 취업 잘 되는 대학이라고 올라온 친구들, 4년제 떨어지고 들어온 나 같은 친구들…. 우리 대학교에는 엄청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내가 가고 싶었던 그 국립대학교의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취업을 위해 다시 우리 학교에 들어온 언니도 있었다. 세상은 참 이상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대학입시 실패라고 창피해서 친구들 조차 만나지 않고 3년을 보냈는데 말이다.
우리 학교 때는 진로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공부 잘하면 서울대 물리학과에 갔고 법대 가서 판검사 되고 의사, 교사 등 ‘사’ 자 들어가는 직업이 최고였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꿈을 키우는 것은 국민학교 때 위인전을 읽으며 마음속으로 막연하게 꿈을 품었던 게 전부였다. 나이팅게일을 읽으며 간호사를 꿈꾸고 슈바이처를 읽으며 아픈 사람들을 돕는 고귀한 의사가 되겠다고 했다. 나는 매일 보는 학교 선생님들을 존경했고 좋아했다. 선생님 말고 다른 직업은 잘 몰랐다. 그때는 꿈속에 낭만이 있었다.
대학에 가면 절대 공부만 하지 않겠어!라고 다짐했지만, 난 1학년 때부터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또 성실히 공부했다. 해부학이 재미있었다. 도서관에서 오래 머물렀다. 국가고시를 보는 3학년들과 어울렸다. 실은 놀 줄을 몰랐다는 게 더 맞을 것이다. 대학 생활의 낭만과 캠퍼스 커플을 꿈꿨지만, 전문대는 달랐다. 하루 7-8교시 수업과 실습이 빡빡하게 짜여 있었다. 볼링 동아리를 만든 것이 유일한 일탈이었다.
1999년도에 나는 물리치료사가 되었다. 지방으로 가면 월급이 많다고 해서 여수로 갔다. 1997년 IMF를 지나오면서 경기가 좋지 않다는데도 물리치료사는 취업이 잘 되었다. 초봉도 나쁘지 않았다. 1년 후, 서울과 경기도를 돌아다니며 5년을 일했다. 월 100만 원씩 꼬박꼬박 저축했고 난 결혼하고 임신을 하면서 물리치료사를 그만두었다.
나는 보건대학교 전체 1등으로 졸업했다. 한때, 대학병원에 들어가거나 교수를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물리치료사는 돈을 버는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이상의 꽃은 피우지 못했다. 대학입시의 실패라고 생각했고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인생은 살아볼 만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물리치료학과에서 사귄 나의 단짝 친구 덕분에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의 금쪽같은 삼 형제는 없었을 테니까. 물리치료사 면허증이 또 고마운 것은 한 번씩 일하고 싶을 때 비정기적으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다. 물론 단순 물리치료, 통증치료실에서만 가능하다.
몇 해 전부터 빈 둥지 증후군을 앓고 있다. 내 둥지의 알들이 새가 되어 혼자 날아가는 연습을 한다. 아이들은 내가 필요 없다고 자꾸 밀어내고 남편 새는 일에 열중하느라 하늘을 열심히 비행 중이다. 내 곁은 오래 빈다. 나는 다시 일하고 싶었다.
아~ 기다리고 기다렸다. 작년에 만났던 그 학교 그 아이들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다시 오겠다고 아이들과 약속까지 했었다. 그런데! 기초학력 강사 모집과 채용은 이미 끝나 있었다. 담당 선생님이 올해는 쉬셔서 공고 나면 원서를 내보라고 하셨는데 내가 시기를 놓친 것이다. 부랴부랴 전주 시내에 남은 학교에 원서를 내보았지만 모두 떨어졌다. 자격 조건이 더 엄격하고 경쟁률이 세다.
물리치료사가 무슨 근거로 기초학력 강사가 될 수 있었을까. 우리 아이들을 가르쳤던 수학 실력과 여러 해 동안 책 읽고 교육받고 독서지도사 1급 자격증만 갖고 처음 도전했던 거였다. 아무런 경력도 없이 새로운 일에 도전했다가 덜컥 합격이 됐던 거였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기회를 주신 학교에 깊이 감사한다.
고대했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이 좀 심란했다. 내 인생의 콤플렉스, 대학입시의 실패 때문에 고3, 고1아들들에게 더 예민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신중하게 고민 중이다. 체력에 자신이 없는데 물리치료사로 취업해야 할지, 가끔 알바만 할지, 공부를 시작해 볼지, 글쓰기에 전념해야 할지….
내가 자랄 때 선생님의 존재는 하늘과 같았다.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에 힘이 났고 꿈이 바뀌었다. 내가 좋아했던 선생님들의 모습이 차례로 떠오른다.
요즘 사회적으로 여러 힘든 일들을 겪는 교사, 선생님들의 이야기만 나오면 가슴이 아프고 아리다. 선생님의 권위가 서고 스승과 제자 간의 사랑과 정이 진실되고 깊어지기를 바란다. 따뜻한 소통으로 아이들의 마음 밭에 선생님들의 좋은 영향력이 존경심의 나무로 자라고 선생님의 마음 밭에는 보람과 뿌듯함의 꽃들이 피어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내가 꿈꿔왔던 일들을 너무 쉽게 포기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이제야 든다. 내가 선생님이 되었다면 또 어떤 인생이 펼쳐졌을까. 상상이 안 된다.
혼자 점심을 먹는다. 아침에 먹다 남은 음식들이 없다면 간편한 라면이 편하다.
그러나 문득 나를 위해 따뜻한 점심을 차리고 싶어졌다.
지금까지 살아오느라 참 수고 많았다고 나는 나에게 쌈을 싸 주었다. 아쉬움은 꼭꼭 씹어 넘기라고 또 한쌈을 싸 주고 앞으로 내가 원하면 어떤 삶도 살 수 있다고 또 한쌈을 먹였다. 내가 키운 적겨자채에 제육볶음을 싸고 찰밥에 견과류 볶음을 얹어 야무지게 싸서 나를 먹였다. 힘내라고. 뭐든 하면 된다고! 할 수 있다고!
P.S.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든 선생님들에게도 한쌈을 전하고 싶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