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해볼 만한 것
다이소에서 씨앗을 사고 나오는 길이었다. 고1 막내가 저녁을 먹으러 오기에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가고 있었다. 한샘 가구를 지나가는데 어쩐지 들어가고 싶다. 시간도 없는데? 걸어 다니며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던 내가 한동안 발길이 뜸했다. 그날따라 한샘에 들어가고 싶었다. 막내 밥 때문에 발을 동동거리다가 나도 모르게 매장으로 들어가 버렸다. 1층을 후다닥 둘러보며 속으로 감탄사를 연발했다.
‘역시 예쁘네. 깔끔하네. 환하다. 수납이 너무 잘 되겠다.’
2층으로 올라갔다. 거실장과 식탁들이 있었다. 커다란 식탁과 기다랗고 각진 의자가 새롭다. 참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설치하고 싶었던 거실장이 보였다. 그 앞에서 또 서성거렸다. 가구 문을 열고 닫고 멀리서 보고 가까이서 보고 또 보았다. TV장 위로 손을 뻗으니 쉽게 닿는다. 우리 집 주택에는 늘 수납이 부족하다. 집 정리와 이사를 고민하며 답을 찾지 못하고 심란하던 차라 가구들이 눈에 쏙쏙 박히며 편리함까지 훤히 보였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80% 세일!!!!!”
눈을 의심했다. 눈을 비비고 더 크게 떠 보아도 80%가 맞다. 순식간에 온몸에 붉은 피가 도는지 엔도르핀이 솟는지 몸이 뜨거워지고 나는 흥분상태다.
이 거실 가구는 10년 전에 이사 올 때부터 설치하고 싶었던 거다. 당시에는 60인치 TV를 넣을 수가 없어서 포기했었다. 5년쯤 전(?)에 더 큰 사이즈가 나왔다는 걸 알았지만 살고 있는 거실에 설치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비싼 가격 때문에 포기했다. 그사이 짐은 더 늘었고 거실 등 곳곳에 짐이 넘쳐났다. 뭔가를 사지 않아도 아이들의 책이며 취미활동이며 생활 짐들이 많아졌다.
나는 흥분한 상태로 집으로 달려갔다. 막내 밥이고 뭐고 거실 사이즈를 확인했다. 600mm, 1800mm, 800mm. 모두 합쳐 3,200mm! 내가 찾던 그 사이즈다. 흥분은 가라앉지 않고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남편에게 문자와 사진을 보냈다.
“나 이거 살래! 80% 세일이래. 00만 원도 안돼. 저번에 봤던 IKEA 거실장이랑 비슷해. 설치 다 해주고 이 가격이면 거저야. 전시 제품이라 우리 집에 딱이야!”
오래된 주택에 새 제품을 들이는 것이 좀 그래서… 망설이고 있던 중이었다. 사실 가격이 제일 문제였다. 연식이 좀 있어도 새 제품이라니 우리 집에 조화롭게 잘 맞겠다 싶었다. 막내가 아직 오지 않아서 안절부절 못 하다가 다시 매장으로 달려갔다.
“TV 거실장 전시 제품! 제가 살게요.”
1층 직원에게 말했다. 직원이 2층으로 올라가 설명해 준다. 혹시 설치가 가능한지 실측하고 결정할 수 있게 물건을 잡아 놓겠다고. 교환 반품이 안 되는데, 설치가 안 되면 큰일이다.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실측을 기다렸다. TV를 놓는 바닥이 우리 TV 다리랑 사이즈가 똑같다. 가구 두께를 생각하면 모자랄 판이다. 실측 팀이 왔다. 다리가 앞으로 조금 튀어나와도 문제없는지 테스트를 해본다. 설치 가능!! 와우~~ 뛸 듯이 기뻤다.
한샘 매장에서 몇 년째 손님을 맞이했을 거실장이 드디어 우리 집에 무사히 안착했다. 어쩜 한 몸인 것처럼 색깔이며 톤이 잘 어울린다. 사람들의 손 때 묻은 자국을 기쁜 마음으로 닦았다. 며칠째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거실 내 책상에 책이 한가득인데 책들이 책상 밑으로 옆으로 흘러넘치고 있고 새 수납공간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 정리가 어렵다는 이야기다. 정리 잘하는 남편은 바빠서 집안일에는 소홀하다. 아니 포기했을 것이다. 어질러진 거실을 보며 꽤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 정리 좀 하라고. 좀 치우라고 잔소리를 하지 않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워낙 짐이 많다 보니 버릴 것과 남길 것, 새 수납장에 넣을 것과 안방 벽장으로 들어갈 것을 구분하는 게 커다란 일이었다. 원래 있던 TV장과 작은 책장의 위치를 잡고 옮기는 것도 혼자서는 할 수 없었다.
나도 며칠 일이 있어 새 가구가 들어왔는데, 움직여진 가구며 튀어나온 짐들이 거실에 한가득 널브러져 일주일째 방치였다.
어쩔 수 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내가 나서야 했다. 내 책과 학용품들을 추려 넣었다. 버릴 것은 버리는데, 필요는 없지만 멀쩡한 것은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들 당근을 하나보다(아직 당근을 못 하는 1인). 10년째 박스에 들어 있던 아미쉬 마을에서 데려온 아미쉬 여자 인형과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의 자유의 종, 뉴욕 여행에서 산 자유의 여신상 미니어처, 나이아가라 폭포 캠핑에서 산 카메라 키홀더 등을 꺼내 장식장에 진열했다. 정리를 하다 잠시 추억에 젖으며 내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페니 콜렉터 북도 이번에 처음 빛을 보았고 먼지를 뒤집어썼던 장식품들과 인형들도 말끔히 목욕하고 자리를 잡았다. 뿌듯했다.
그런데, 하루 종일 치운다고 치워도 비슷했다. 휴일 당직을 서는 남편, 아직도 대답하지 않는 막내….(9화 참고 다시, 텃밭을 가꾸기로 했다) 연휴를 맞아 나는 본격적으로 청소를 시작했다. 머리가 복잡하거나 스트레스가 쌓일 때, 난 청소를 한다. 화장실 청소나 창틀 먼지 제거가 제격이다. 그러나 정리는 많이 어렵다. 나 대신해 줄 엄마가 없으니까, 내가 어른이니까. 당연히 내가 해야 한다.
(어릴 때, 어렵고 힘든 건 엄마가 해주셨다는 걸 새삼 느낀다. 이젠 내가 엄마구나......)
몇 년째 입지 않은 옷들도 과감히 정리했다. 언제가 입을 것 같았지만, 절대 입지 않는다. 공간이 생겼지만 그래도 부족하다. 나는 옷으로 만든 *쓰레기산 다큐를 보고 옷 사는 것을 자제하는 편이지만 아들들까지 강요할 수는 없었다. 첫째와 막내는 철철이 옷을 사 쌓아 올린다. 저렴한 옷들이라 오래가지 못하고 유행에 민감한 것들이라 사고 쌓기를 반복한다. 그들도 자신의 소비 패턴과 경험을 알아가는 과정이라 참아 주어야 한다(차차 말해주긴 해야겠다). 둘째는 중학교 이후 거의 옷을 사지 않는다. 옷에는 관심이 없다. 아이들마다 개성이 다르다.
당직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이 거실에 들어서자, 발 디딜 틈이 없다. 일단 배불리 먹이고 우린 본격적인 정리에 돌입했다. 옷장의 위치도 바꾸고 가구를 드러낸 공간의 묵은 때를 벗기자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틈새 수납장도 새로 사 조립하고 새벽 2시가 되어도 정리는 끝나지 않았다. 다음날 연휴에도 남편은 아침을 먹고 출근했다.
나는 치우고 정리하고 재활용과 쓰레기를 모으고 이틀, 사흘 째 아직도 정리 중이다. 거실 한편에 커다란 장바구니에 짐들이 쌓여있다. 아들들 물건이라 쉽게 버리지 못하고 새 참고서를 그대로 버리자니 아까워 망설이며 고민 중이다. 아이들의 그림들, 장난감들, 작아진 기념품 옷들….
십 년 살림을 며칠 만에 다시 정리하자니 거의 이사 수준이었다. 하지만, 나의 지난 시간들을 되짚어 보는 과정이기도 했다.
20대부터 쓴 가계부와 적금, 보험표. 돈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조목조목 적어 표로 만들었구나. 새해마다 이루고 싶은 소망들을 적어 둔 메모장, 버리지 못한 영수증들. 내가 적는 걸 좋아한다 것과 꽤 꼼꼼했다는 증거를 확인한 느낌이다. 메모장들이 여기저기서 정리가 안 된 상태로 불쑥불쑥 튀어나오거나 너무 깊숙이 숨겨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먼지가 소복이 쌓여 부옇게 내려앉았던 인형들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내 앞에 서 있다. 갈색 얼룩이 드레스 레이스 위에 검버섯처럼 들러붙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밝고 화사했던 인형 얼굴에 강렬하고 선명한 갈매기 날개 같던 눈썹이 희미해졌다. 숱이 없어 옅어진 내 눈썹이 거기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모습이 싫지 않았다. 나 같아서. 함께 살아온 시간이 정으로 옹이 져 박힌 듯 내 가슴을 찌르르하게 만들었다.
정리! 그것도 해볼 만한 것이었다. 말끔하게 치우고 나니 앞으로 10년은 또 무엇으로 채울지 기대가 되었다.
새로운 시작이 새싹처럼 피어오른 것 같다.
*옷 쓰레기산 다큐
https://www.youtube.com/watch?v=gw5PdqOio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