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애쓰고 있어요
“짜잔~ 예쁘지? 오늘 남부시장에서 모종 사 왔다~ 청상추와 적겨자채 그리고 방울 토마토지롱. 방울 토마토는 살 생각이 없었는데, 바질 보니까 사고 싶더라고. 둘 다 키워서 피자 만들어 먹으면 좋을 것 같아. 바질 모종은 좀 비싸서 씨앗을 사려고. 다이소에서 1,000원이래. 바질은 추위에 약하다니까 천천히 파종해서 키워 볼 거야.”
(방울 토마토와 바질 키워서 어느 세월에 피자를 만들어 먹을까요? 가능할까요?ㅋㅋ)
나무 데크로 사각 화분처럼 만든 작은 땅에 아기 청상추와 적겨자채를 예쁘게 심었다고 나는 퇴근한 남편에게 재잘거렸다.
“사 먹는 게 나.”
남편은 내 얼굴 가까이 다가와 찬물을 끼얹는다.
“아니야! 이번에는 잘 키울 거야. 유튜브 보고 공부도 했어.”
“우리 집 정원은 해가 안 들어서 텃밭은 안 돼.”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남편의 김새는 대답에 내 목소리가 기어들어 간다.
집채만 했던 바나나 나무(파초)를 베고 무성했던 풀들을 정리한 다음, 아담하고 앙증맞게 데크 화분을 만들어 놓은 분은 본인이면서!
10년 전, 2층 단독주택에 들어오면서 화분 10개를 샀고 채소 모종을 심었다. 강렬한 햇살 아래 놓인 옥상 화분에는 매일 물을 주었어야 했다. 자주 올라가 들여다보았어야 했다. 무더운 여름을 한해도 넘기지 못하고 옥상 화분은 폭삭 망했다. 이듬해 1층 마당으로 화분을 내렸다. 하지만, 또 망했다.
한국 초등학교에 처음 다니는 아이들 셋을 돌보느라 눈앞에 있는 화분들은 보이지 않았다. 키운 작물을 먹을 욕심만 있었지 텃밭에 마음이 없었던 거였다.
그러고도 몇 번 더 채소 모종을 심었다. 하지만, 벌레들이 제 집처럼 왔다 갔다 하며 다 먹어 치우는 걸 보고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달팽이가 사라진 빈 껍데기처럼 열 개의 화분만 남았다. 마당 한 구석에 겹친 화분들이 몇 년째 방치되어 있다.
어느 해인가 국화를 사 왔다. 또 죽였다. 농사는 포기하고 꽃나무를 심어 본 것이지만, 식물 키우기에는 영 소질이 없나 보다. (아닌데 이상하다. 미국 발코니에서는 고추와 오이, 깻잎, 상추까지 잘 키워 먹었는데... 어린아이들 키우듯 같이 물주며 함께 컸던 것 같기도.... )
포기란 없다. 내가 그렇게 강한 의지의 사람은 아니지만, 아무튼 시장 산책을 갔다가 수국을 사 들고 왔다. 꽃이 너무 예뻐서 충동적으로 사 온 것이었다. 어쩐지 최근 꽃들이 자꾸 내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우리 집 마당은 남향인데도 앞집이 바짝 붙어있어 해보다 그늘이 길다. 한나절 해가 잠깐 비치고 만다. 그런데 수국 두 그루는 잘 자랐다. 특별히 애정을 쏟은 것도 아닌데 몸집을 늘리며 풍성하게 자란 수국은 지난해 5월에 꽃을 피웠다. 처음 사 올 때의 꽃이 지고 가지와 잎만 무성하더니 드디어 작년에 스스로 꽃을 피운 것이다. 얼마나 기특했던지.
작년부터였나 보다. 아들 군대 보내고 비로소 꽃이고 마당이고 화단에 마음을 붙인 것이. 기특한 수국과 보고 싶은 아들 덕분에 장마철 삼목도 처음 시도 해봤다. 성공했다. 대문 옆 작은 화단에 작은 수국들이 다섯 그루 자라고 있다.
며칠 전부터 마음이 편치 않다.
고3 아들의 중간고사 결과가 시원치 않다는 소문과 영어는 안 하고 수학에만 매달렸던 고1 막내가 수학도 망했다는 소문이 내 귀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고3 아들은 공부는 안 하고 기타만 두들기는 것 같았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면서도 안타까웠다. 마지막 현역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인데, 시간은 되돌리 수 없는데... 아무리 말을 해도 둘째의 가슴에는 닿지 않는 것 같다. 막내는 중학교 때 운동만 해서 나랑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올라가자마자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으로 확 바뀌어서 놀랐다. 결과야 어떻든 흡족했다. 수학 학원을 바꾸고 영어 과외까지 붙인 보람을 느끼며 내심 좋은 결과를 기대했었나 보다.
수학 망했다는 소리에 내가 막 퍼부었다.
"그거 봐! 수학 하나에 몰빵해도 결과는 장담할 수 없는 거야. 영어는 공부한 만큼 나오고 노력에 비해 점수받기도 쉬운 과목이라고 했잖아!"
막내는 뒤늦게 시작한 공부의 양이 버거웠는지 영어 공부는 안 하고(그만두겠다는 걸 억지로 끌고 가던 중)
수학 하나에만 집중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아직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내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 것 같아서 속상했다. 그거 보란 듯이 내 말이 맞다고 설교하고 화를 내고 말았다.
방에 들어간 아들이 조용하다. 순간 미안해졌다. 열심히 공부한 아들에게 위로는 못해주고.... 속상할 아들에게 안 해도 될 말을 한 것이다. 후회가 밀려왔다.
밥이라도 맛있게 차려주고 달래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막내가 나왔다.
"엄마, 여기서 포기할 순 없어. 공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수학을 90점 넘게 받겠다고 한 것은 욕심인 것 같아."
막내가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웠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기말고사 때 만회할 수 있어. 포기하지 않으면 분명히 오를 거야."
진심이었지만, 걱정도 됐다. 둘째 아들이 고1 때, 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들, 괜찮아. 너 공부한 지 얼마 안 됐잖아. 이제 시작이야. 앞으로 올리면 돼."
고1 때 오를 거라던 둘째의 성적은 고3 때도 제자리걸음이고 더 떨어지고 있다.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이럴 때 첫째가 옆에 있다면 동생들에게 큰 힘이 될 수도 있을 텐데..... 큰아들이 보고 싶어졌다.
시험을 못 본 고3 둘째가 얼마 전부터 갑자기 닭가슴살을 사놓으라고 야단이다. 2층으로 통하는 문을 자주 닫아 둔다. 어제 알았다. 한밤중에 운동을 하는 거였다. 요즘 유행이라는 헬스를 하는 모양이었다.
결국, 어젯밤에 한 소리씩 하고 말았다.
새벽 2시까지 운동한 고3 둘째에게,
"도대체 공부는 언제 할 거야. 고3 끝나고?"
시험 끝나고 오늘 수학여행에 가는 막내에게,
"짐은 언제 쌀 거야? 준비물은 다 넣었어?"
내 잔소리가 퉁명스럽게 기어 나와 허공을 떠돌았다.
"당신 왜 그래? 내버려 둬. 기다려 줘야지. 공부는 자기가 스스로 하려고 했을 때, 의미가 있는 법이야. 말 이쁘게 안 하면 아이들은 더 엇나가고 사이만 나빠진다고."
옆에서 남편은 아이들이 들을까 소리도 없이 입모양으로 내게 말했다.
"또 내가 잘못했지.... 아이들에게는 한 마디도 못하면서."
우리도 아슬아슬했다.
오늘 아침. 고3 둘째는 인사도 안 하고 쌩하니 학교에 가 버렸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간 막내는 도착했냐고 물어도 답이 없다.
"사이만 나빠진다고"
남편 말이 자꾸 내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다이소에서 바질과 당근, 로켓루꼴라 씨앗을 사 왔다. 빈 화분에 씨를 뿌리고 매일 물을 주었다. 사흘 만에 로켓루꼴라의 싹이 올라왔다. 작은 씨앗에서 어떻게 잎을 내고 뿌리를 내리는지. 그저 신비로웠다.
몇 주 만에 화단이 풍성해졌다. 자연의 힘은 위대했다. 온화한 해와 따뜻한 바람, 봄이 내 텃밭을 키우고 있다.
누가 가르쳐 준 적 없어도 햇살을 먹고 물을 빨아들이며 싹을 틔우는 신비가 우리 아이들에게도 숨어있지 않을까. 불끈불끈 올라오는 나의 욕심을, 내 잔소리를 꾹꾹 눌러 밟는 중이다.
식물을 키우는 것은, 자식을 키우는 것과 닮았다. 아이들에게도 서운해하지 말고 화내지 말고 기다려주었어야 했다. 내 기준을 갖다 대지 말고 믿어주고 그저 바라봐 주어야 했나 보다.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아이 때와는 달랐어야 했다.
"내가 알아서 해."라는 아이의 말은 "나도 애쓰고 있어요."라고 해석해야 했나 보다.
아이들과의 관계의 텃밭도 다시 가꾸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