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란 말 참 좋지요. 라고 시작한 편지가 있었는데 그게 우리가 일 년쯤 만났을 때 썼던 첫 문장 같습니다.
당신의 시간은 잘 흐르고 있나요.
오전부터 바삐 움직이다, 낮잠에 들까 했다가 생각의 홍수가 끊임없이 당신을 제 머리에 이양시켜 자리를 일으켜 이렇게 글을 씁니다.
당신은 나와 했던 모든 장면을 어떻게 기억할지, 내겐 낭만이지만 당신에겐 그저 한 지나가는 텔레비전 속 한 장면이었을 지도 궁금합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기억하나요. 당신.
우리가 만나기 시작할 즘,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당신을요. 이렇게 되어버린 건 이성이 다시 작동한 건지, 이성이 망가진 건지 잘 모르겠네요.
단지 당신과 나는 끊임없는 승자도 없는 줄다리기를 했고 그것이 상금을 주는 일도 아니었는데 우리는 그래야 했던 것 같습니다.
이 줄다리기를 멈추면 어느 한쪽이 넘어지는 일임을 모르지 않았던 우리가 있었던 걸지도요.
당신의 삶에 제가 함부로 들어가 너무 많이 헤집어 놓고 나온 건 아닌지 걱정이 되다가도 어느 돌산에나 있는 큰 암석같이 서 있곤 하는 당신 성품을 생각해 보면 조금 안심도 됩니다.
사랑을 만능처럼 여기던 제가 당신은 조금 의아해하셨나요.
제가 너무 철이 없고 논개처럼 몸을 던지는 제가 이상했을까요. 당신에겐.
그러나 저는 그것을 그때는 해야 했었고 돌이켜보면 사실 당신도 그것을 바랬던 것 같아요.
당신의 눈동자를 몇 번이고 쳐다보았습니다. 그 깊은 곳에 있는 잔물결이 조금 더 들여다보고 있으면 쓰나미처럼 보이곤 해서 아주 오랫동안 들여다보다가 제가 사라질 것 같을 때 눈을 돌리곤 했던 것도 같아요.
당신이란 책을 아주 오랫동안 펼쳐놓고 읽고 또 읽다 너덜너덜해졌는데 저는 당신을 읽었던 건지 아니면 당신을 읽어서 당신이 이제 덮인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당신이 나를 읽을 필요가 있나요. 하고 물었죠.
지나고 보면 그 독해가 나를, 그리고 그대를 더 사랑하게 만든 일 같아요. 나는 열심히 그리고 아주 열렬히 그대를 읽어나갔습니다.
어때요. 당신.
당신의 삶이 조금 손으로 그린 꽃 한 송이처럼 삐뚤하게라도 남았나요. 그러길 바랐던 것도 제 욕심이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당신이 부디 빨리 늙기를 바라다가 폭삭 한번 늙었다가 영영 어려지기도 바랍니다. 하지만 언젠가 한 번은 늙기는 하겠지요.
폭삭 그대가 늙어서 문득 그 시간의 문이 넘실넘실 당신 앞에 덮쳐올 때면 조금 생각할까요.
당신에게 매달려 발만 동동 띄운 채 당신을 바라보고 애정했던 저의 마음들을요.
버스를 타고 채 못 틔운 꽃봉오리들을 바라보다 왈칵 울음이 나옵니다.
사랑이란 그런 건데 꽃봉오리처럼 틔워지길 기다려야 하는, 그런 건데.
당신의 세상에는 그 사랑이 너무 분분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아 이게 맞다고, 조금 이르지만 언젠가는 마주해야 했을 맞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도닥입니다.
당신의 삶은 꼭 맞는 규격 같지만 때로 저에겐 낭만을 비춰주려 했단 사실 또한 모르지 않습니다.
그것이 당신을 무리하게 했다는 사실도, 당신에게 어떤 위협을 가하고 있었단 사실도 압니다.
부디,
끝끝내 당신은 발밑에 어떤 하얀 선을 그으며 사시겠지만
당신의 삶에도 잊지 못할 동화가 있었다고, 가끔 그런 책을 펼쳐보기도 하면서
행복 말고 안녕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