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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바위보에서 져요, 우리

by 송유성

그를 만나도 이제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는 내가 나다워졌음을 하루의 시간을 쪼개어 생각해도 똑같아요.


그를 사랑했던 일의 어느 한 조각도 부정하지 않아요. 그와 헤어지고 겪은 벼락같았던 슬픔을 생각하면 부정해야 맞는데 나는 긍정뿐이에요. 그를 만나는 동안에도 울었고 그를 보내고도 한참을 더 울었지만 힘든 일이었다는 것과 후회하는 일은 다른 방법으로 걸어가더라고요. 나는 그를 만나 사랑을 했던 일을 아주 몹시 좋아하게 되었어요.


이제는 그를 생각하면서 그리워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를 그리워하지는 않지만, 말라버린 은행잎처럼 연약하고도 어색한 포옹을 했던 시간은 조금, 그리운 것 같아요. 인생은 살면서 그때여야만 가능했던 것들이 있더라고요. 그를 만나 사랑에 빠졌던 날이 잘 익은 달큰한 순무처럼 적당했던 것 같아요. 유달리 추웠던 12월, 우리는 둘 다 손이 찬 사람들이었고 제 주머니에는 손난로가 있었죠. 손이 차다는 핑계로 손난로를 함께 잡으며 사랑에 빠져갔던 그 겨울이 참 적당했던 것 같아요.


돌아보니 너무 닮아서 어려웠던 것 같네요. 누구 하나는 손이 따뜻한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봐요. 그는 우리가 다른 사람이어서 이별을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는데 전 우리가 너무 닮아서 똑같은 손만 내밀었기에 이별했나 싶어요. 가위, 바위, 보를 하며 계속 비기기만 했던 우리였어요.


그러나 우리에게도 여느 봄날처럼 안온한 구원이 오갔던 날이 있었지요. 평화롭고 기름진 시간이 페이스트리 파이의 겹 사이에 퍼진 버터처럼 고소하게 우리의 어느 계절에 있었습니다. 그런 부드러운 순간들이 있었기에 그토록 즐겁게 사랑을 했겠죠. 나는요, 지금도 생각해요. 그 사람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요. 그리고 지금도 믿죠. 사랑은 사람을 바꾸는 일이라고도요. 겁이 많이 사라졌거든요. 그를 만나고 많이도 아팠지만 내가 더 용기 있어진 것은 아무것도 재지 않고 사랑했었기에 가능하겠지요. 그저 우리는 언제나 서로의 옛 동화로 남는 시간을 기록해 오고 있었던 것뿐이겠지요.


그를 떠나보내고 나서 삶이 더 행복해졌어요. 약한 바람에도 쏙쏙 빠져버리는 민들레 홀씨처럼 연약했던 제가 민들레 뿌리가 된 것도 같아요. 나는요, 사람들의 애정이 더 잘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의 틈을 바라보다 사랑에 빠졌고 그래서 오랫동안 나오지 못해서 아팠지만, 여전히 나는 틈을 바라보는 것이 좋아요. 틈을 한참 바라보다 보면 자유로움을 느낍니다. 나는 왜인지 세상으로 더욱 잘 들어가고 있어요. 그를 향한 내 바람은 그때도 지금도 다름이 없습니다만, 그와 마지막으로 했던 통화는 아마 이루어지지 못한 것 같아요. 사랑과 낭만이 가득하길 빌었습니다. 하지만 모두 다 내려놓고 단지 부디 강건히 살기를 바라요.


막 좋아요. 밥알이 씹혀서 단맛이 나는 것도 좋고요. 사람들의 이마에 주름이 늘어가는 것을 보는 것도 좋아졌어요. 나만 할 수 있는 사랑을 했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사실 제일 좋아요. 지난 애인들을 나는 아직도 다 사랑하는 것 같아요. 하나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사랑이 많아서 자꾸 고꾸라지고 많이 울지만 나는 그런 것들로 삶을 그려내는 사람이더라고요. 그렇다면 나는 다른 사람보다 사랑을 더 많이 먹고 문지르고 자꾸 주면서, 그렇게 삶의 긴 언덕을 잘 오르면서 살 수 있을 것만 같아요.

모두가 자꾸만 지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일부러 말이에요. 일부러 져 주는 사람은 언제나 더 다정한 쪽이죠. 다정은 삶에 색을 입히고요. 우리는 가위, 바위, 보에서 알면서도 자꾸만 지는 패만 내고 살아야 해요. 그래야 나도 좋고 모두 사랑만 하게 될 일 아니겠어요. 지는 사람들이 가득해져서 모두 바보처럼 행복한 사랑만 하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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