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지 못한 인사 _ 안녕 첫 사랑
끝이라고 느끼게 되는 순간은 생각보다 슬프지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침착해지고 냉정해지기까지 했다.
K에게 시간을 갖자고 통보한 뒤, 정확히 나흘째가 되던 날이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국을 데워 밥을 크게 퍼 담았다. 식탁에 앉아 첫술을 뜨려는데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밥그릇을 중간쯤 비우고 답을 해야지 하며 고개를 돌리다가 나도 모르게 메시지 창 속 단어를 보게 되었다. "심심해"라는 세 글자를 읽자마자 밥숟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서운한 감정은 아니었고 허탈함에 가까웠다.
인기척 없는 거실에 앉아 잠시 허공을 보며 이제는 끝에 다다랐다고 생각했다. 식탁 모서리에 조마조마하게 걸친 숟가락을 다시 들었다. 미역국이 너무 맛있어서 남은 밥알을 싹싹 긁어먹었다. 배를 채우니 용기가 생겼다. 절대 이별은 없을 거라 자신했었는데 결국 내가 놓아버렸다.
심심하다는 말에는 끝내 답을 적지 못했다. 어영부영 며칠이 또 흘러갔고, 살얼음 같았던 그간의 추위는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화단에는 초록 풀이 서서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고, 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K는 똑똑하고 남자다웠다. 일을 잘하고 생활력이 강해 그만큼 책임감이 큰 사람이었다. 둘 다 연애가 처음이었고 모르는 것이 많았던 우리는 순간순간이 놀라움이었다.
만난 지 4년 차가 되던 때부터였을까, 그는 조금씩 나의 삶에 너무 큰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조금씩 나는 예상하고 있었다. 관심이 지나치게 커지면 간섭이 되고, 무심하게 흘리는 조언과 충고는 곧 사람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그는 나를 너무나, 자주 걱정하다가 결국 선을 넘어버렸다. 불안정한 예술가의 길을 걷기 위해 애쓰는 내게 완벽한 응원 대신 불필요한 조언만을 주고 있었다. 더는 그 옆자리를 지키고 싶지 않았다.
3월이 됨과 동시에 나는 K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보냈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커피숍에 나와 커피를 시켜 두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아이스티. 늘 먹던 메뉴와 앉았던 자리는 익숙했지만, 5년 동안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던 말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머리가 하얘지고 있었다. 헤어지자는 말을 기분 좋게 전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만 최대한의 예의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가게 안으로 멋쩍게 웃으며 걸어오는 그는 나에게 아직 화가 많이 났냐고 물었다.
막상 얼굴을 마주 보니 나는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한 번도 그에게 화를 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것도 문제였다. 화가 나면 화를 내야 했고, 통하지 않으면 크게 소리쳐야 했었다. 적어도 한 번은 거칠게 표현했어야 했지만 늦은 뒤였다. 누르고 누르다 더는 아무 힘도 남지 않아 버렸다고 말했다. 앞으로의 미래를 그리는 것도,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는 것도 자신이 없다고.
하루아침에 돌아선 내가 많이 미웠을 것이다. 앞에 놓인 냅킨을 손에 놓지 못하고 나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내게도 이유는 있었지만 단번에 납득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었다. 우리는 5년을 만났고, 그중 4년을 매일같이 만났다. 작은 동네 안에서 안 가본 곳이 없고 해보지 않은 것도 없을 만큼.
봄이면 함께 꽃을 보러 다녔고, 여름이면 함께 낚시를 했다. 가을이면 맛있는 빵과 커피를 들고 드라이브를 다녔고, 겨울이면 눈밭에서 사진을 찍었다. 더울 때 덥지 않았고 추울 때 춥지 않았다는 이상한 표현은 계절은 바뀌어도 서로의 온도는 그대로였다는 말과 같았다.
2023년 3월 3일, 우리는 헤어졌다.
혹여 우리가 이별을 한다면 뮤지컬에서 봤던 커튼콜처럼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현실은 억지웃음에다 애써 멋진 덕담을 지어내느라 바빴지만, 다행히 눈물도, 큰 소란도 오가지 않은 채 우리는 마침표를 찍었다. 함께 커피숍 밖으로 나와 심심한 인사를 건네며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엔딩이었다고 생각했다.
우리에겐 화려한 조명도, 빛나는 꽃가루도 없었지만 충분했던 지난 시간들이 K와 나를 위로해 줄 거라 믿고 싶었다. 시간이 흘러도 그날의 어리숙한 커튼콜을 아직 잊지 못했다. 그 속에는 미련이나 아쉬움과는 또 다른 특별함이 있기 때문이다.
가끔 건너 건너 K의 소식을 듣곤 한다. 좋은 사람을 만나 새로운 환경을 꾸리고 분명 더 나은 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나도 나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중이다. 비록 사랑과 연애와는 멀어지고 있지만 나만의 것들로 시간들을 채우고 있다.
한 번쯤은 글로 남기고 싶었던 시간들이었다.
그동안은 감정에 치우쳐 되새기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를 응원한다. 온 마음을 다하지는 못하겠지만, 최선의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