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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 각자의 영화관 Jun 26. 2024

낭만적인 여행자를 위한 가이드

Before Sunset(2004)


탑승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오면 손에 쥔 티켓을 연신 들여다보며 좌석 번호를 확인한다. 복도를 지나며 두리번거리다 이내 자리를 찾아 짐을 올려두고 앉는다. 내 자리는 언제나 창문 옆이다. 창 너머로 두둥실 구름이 떠 있기도, 멀찍이 보이는 풍경이 가로로 빠르게 지나가기도 한다. 괜스레 카메라를 꺼내어 사진을 몇 장 찍어본다. 분주히 자리를 정리하다 테이블을 펼친다. 이제는 제법 친숙해진 설렘을 안고, 골라두었던 영화의 재생 버튼을 누른다. 몇 시간 후면 도착하게 될 어딘가의 풍경이 작은 화면 안에 펼쳐진다.


익숙함과 낯섦을 잇는 길 위에서, 한발 앞서 그곳에 도착하는 방법이 있다. 바로 목적지를 배경으로 하는 멋진 영화를 보는 것! 어떤 이는 프레임 안에서 아름답게 연출된 모습이 헛된 기대와 실망을 안겨줄 것이라 짐작할 수도 있겠다. 물론 도착한 뒤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영화처럼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그림은 아닐 테지만, 그 틈에서 영화를 상기시키는 작은 조각을 발견한다면 틀림없이 꽤 낭만적인 기분을 느끼게 될 거다.


피렌체로 가는 기차 안에서 ‘냉정과 열정 사이’(2001)를, 홍콩에 가는 비행기 안에서는 ‘중경삼림’(1994)을, 지난 겨울 삿포로행 비행기에서 ‘윤희에게’(2019)를 관람했다. 숨을 몰아쉬며 열심히 오른 두오모의 꼭대기 층,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 하얗게 눈 쌓인 오타루 거리에서 묘한 기시감과 함께 금방이라도 영화 속 주인공을 마주칠 것 같은 두근거림을 느꼈다.


9년 전 낡은 맥북과 Before Sunset의 카페 장면


언젠가는 좋아하는 영화 속 장소들로 하루를 채워보기도 했다. 파리에 머무르던 시절의 어느 날, ‘Before Sunset’(2004)에 등장했던 카페에 가보기로 했다. 아침 겸 점심을 간단히 먹고, 영화의 그 장면을 재확인한 뒤 집을 나섰다. 도착한 카페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제시와 셀린이 앉았던 자리 역시 비어있는 상태였다. 관광객보다는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공간인 것 같았다. 바로 그 자리에 앉아 Cafe crème 한 잔을 주문해 마시고, 간단한 일기를 적고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냈다. 세상에, 내가 영화 속에 들어와 있다니!


들뜬 기분으로 카페를 나와 Shakespeare and Company 서점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영화 속에서는 금방 도착하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거의 3km 정도의 거리였다. 바스티유를 지나 센 강을 건너가는 길이었다. 도보로 꽤 먼 거리였지만 날씨가 좋아서 기분 좋게 걸었다. 바스티유의 아름다운 카페와 상점들을 둘러보고, 맑은 하늘과 강을 감상하고, 사람들을 관찰하며, 강변에서 팔고 있는 헌 책들을 뒤적여 보기도 했다. 한참 걸어 도착한 서점에서 그날을 기념하기 위해 <Before Sunrise & Before Sunset> 각본집을 구입했다.


Le Pure Cafe


그 영화가 아니었더라면 가볼 일이 없었을지도 모를 카페에서 영화 속 장면을 떠올리고, 평소 같으면 지하철을 타고 무심히 지나갈 거리를 영화 속 주인공처럼 걸어보고, 반짝이는 강가의 풍경을 바라보며 마음에 들었던 대사를 복기한다. 조금 더 낭만적인 여행을 위해, 떠나기 전에 영화 한 편을 골라보는 건 어떨까? 영화를 보고 찾아간 장소가 영화 속 모습 그대로라면 무척이나 반가울 테고, 실제와의 간극이 있을지라도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나만의 색다른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글쓴이 : 서울의 S

틈만 나면 어디론가 훌쩍 떠날 계획을 세우는 브랜드 디자이너. 매일의 안락함을 포기할 수 없는 현실주의자이지만, 동시에 먼 곳의 낯선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영화와 여행의 공통점은 비일상의 낭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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