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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운대 줌마 Apr 30. 2024

우리 강아지!

 아무튼 말

“우리 똥강아지 왔어. 쭈쭈 쭈쭈! ”

증손자의 조막 한만 손을 잡고 살살살 흔드신다.

“호로로로 까꿍! 호로로로 까꿍! ”

다섯 명의 당신 자식과 열 명의 손주를 보신

시어머님만의 필살기로 아기를 얼러신다. 

     

아기는 멀뚱멀뚱하더니

까르르 까르르 

금방 웃고 만다.

내일모레가 구순인 시어머님도 

아기 따라 

방실방실 웃으신다.  

   

증손자와 상할머니의 시간은 평화롭게 흐른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내 기억의 회로는 이십 년 전 어느 초등학교 교무실에 다다른다. 

    

 “우리 똥강아지. 똥강아지, 교사가 이런 언어를 써도 됩니까? 

  아이는 사람이 아닙니까? 어떻게 사람한테 ‘똥강아지’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까?”    

  

학부모 민원 사안을 교장 선생님이 교무 회의 시간에 공개했다. 

사안을 확인해보니,

60대 초반의 1학년 담임교사가 아이가 너무 귀여워서 매일 에칭처럼

 “우리 똥강아지, 똥강아지.” 라고 불렀다고 했다.

학부모가 담임교사의 말투와 표정을 보지 않은 상황에서 

아이의 말만 듣고 부정적인 의미로만 생각해서 생긴 헤프닝이었다.      


아뿔사!

남북한 분단의 역사가 길어지면서 언어의 장벽도 높아진다는 말은 들었어도,

60대 여교사와 20대 학부모 사이의 언어의 벽이 있네?

한 세대 안에서도 그런 언어의 간극이 있다는데 적잖이 놀랐다.

빠르게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탓으로만 단정 짓기에는 왠지 좀 설명이 부족한 듯했다. 

언어의 창조성과 개방성에 대한 이해가 좀 야박한 건 아닌가? 

나름대로 아쉬워했더랬다.

   

나도 20대 후반에 남자 아기를 낳았다.

아기를 데리고 시골 어머님 댁에 가면 동네 할매들이 우르르 아기 구경을 오셨더랬다.

“ 그놈, 참 밉상이네. 밉상 !” 

아기와 눈 맞추고 입으로 다양한 소리음도 내시며 아기를 얼러주셨다.    

그 시절 이웃집 할매들의 순전한 사랑이 따스하고 고마웠다.

 

아기에게는 잘 생겼다, 예쁘다는 말을 삼간다고 나는 알고 있었다. 

귀여운 아기를 삼신할미가 질투한다고 그렇게 역설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을. 


‘똥강아지’라는 표현도 비슷한 맥락이다.

 아프지 말고 까탈스럽지도 말고 마구 뛰어 노는 강아지처럼 튼튼하게 잘 자라라는 뜻이 담겼다.  

   

내 두 아기도 할매의 따뜻한 염원 같은 소리를 듣고 자랐다. 

어느새 큰아들은 색시를 얻고 아기 아빠가 되었다.  

   

30대 초반의 우리 며느리는 구순이 가까운 시할머니의 언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눈 앞에서 시할머니의 환한 표정과 다정한 말투를 보고 있으니

제 아가를 뭐라 불러도 소통에 문제가 없을 테지만 말이다. 히힛

  

언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한다고 한다.

이제는 옛날 어른들의 정감 있는 표현도 옛 소설 속에서나 찾을 수 있을지?

왠지 그런 말들이 우리 곁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게 안타깝다.     

사회의 급격한 발전과 다양화에 의해 새로운 언어가 무수한  만들어지고 있다.


옛날 할매들의 역설적이면서도 

매사에 조심하고 절제하라는 지혜가 깊이 담긴 말.

온돌방 구들장처럼  따스한 온기과 사랑을 품은 말들이

요즘 세대가 만들어 내는

재미난 신조어와 함께 오래오래 통용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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