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뮤하뮤 Sep 27. 2024

맛 대 맛

마리마리마리

  지하철 역사 안에는 은근히 먹을 것을 파는 곳이 많다. 치명적인 버터입자를 공기 중에 마구 뿌려대는 빵집부터 48시간은 끓였을 것 같은 진한 어묵탕도 있고, 참기름 냄새 솔솔 나는 꼬마김밥집도 있다. 아무래도 오고 가는 길에 출출한 배를 달래려는 손님들이 많다 보니 커다랗게 속이 꽉 찬 정식김밥보다는 이쑤시개만 한 도구로 쏙쏙 입으로 가져갈 수 있는 마리(꼬마) 김밥집이 많은 것 같다.


  그중 내가 좋아했던 마리김밥집은 경의선라인에 있는 한 역사에 있는 김밥집이다. 마리김밥뿐 아니라 매운 어묵, 잔치국수도 간단히 먹을 수 있다. 마리 종류도 다양하고 밥에 간이 적당히 잘되어 있어서 돌아서면 생각나는 매력이 있다. 예전에 가깝게 살 때는 그 지하철역을 이용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주 갔었다. 급하게 환승을 하다가 배가 고파올 때 잠시 발걸음을 멈춰 시계를 본다. 이십 분의 여유만 있어도 김밥집으로 들어가고는 했다. 이사를 한 후에는 웬만해서는 그쪽으로 갈 일이 없어서 아쉽다. 김밥을 두 개 정도 골라 담고 어묵 두 꼬치나 밥그릇만 한 그릇에 담아주는 미니 잔치국수를 주문해서 먹으면 급한 대로 허기가 달래졌다.


  주로 선택했던 버전은 볶음 김치가 들어간 꼬마김밥이나 참치마요, 또는 진미채가 들어간 김밥이다. 여기는 마리도 맛있지만 가장 생각나는 건 매운 어묵인데 빨간 양념이 너무 맛있게 매워서 생각만 해도 혀 안쪽에서 침이 솟는다. 세상에는 맵기만 하고 맛있지 않은 매운맛도 많은데 여기 매운맛은 엄청나게 매운데 맛있다. 그런데 어떤 시간대를 기점으로(그게 언제였는지, 이유는 뭔지 잘 모른다) 매운 것을 못 먹는 체질이 되어서 (맵지 않은) 순수한 어묵이나 쫄깃 탱탱한 물떡을 한입씩 베어 먹으면서 매운 어묵 쪽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봤다.


  이 집의 많은 메뉴가 제법 자극적인 편이라 자극적인 맛을 달래줄 것이 필요한데 여기에는 잔치국수가 안성맞춤이다. 이 집에서 파는 잔치국수는 얇은 에그누들 같은 소면을 사용한다. 맑은 장국에 소면을 넣고 약간의 계란지단과 미역조각을 고명으로 얹어준다. 몇 번 젓가락질하면 그릇이 다 비워질 만한 양이라 부담이 적다.


  어제는 평소에 잘 이용하지 않는 지하철역을 지나다가 밥때를 놓친 것이 생각나 요기를 하기 위해 두리번거리며 간단한 먹을거리를 찾아보았다. 예전에 아까 그 집에서 먹던 꼬마김밥집이 생각나 보이는 마리 김밥집으로 들어갔다. 퇴근을 하고 집에 가는 길인지 잔뜩 지친 표정으로 간식을 먹는 사람들이 어묵꼬치와 국물을 후후 불며 마리김밥과 떡볶이를 입으로 연신 가져갔다. 나는 늘 먹던 대로(볶음김치 마리김밥과 참치마리) 김밥을 주문했고 좀 아쉬워서 구운 계란도 두 개 추가했다. 사장님이 잘라준 마리 김밥을 이쑤시개로 콕 찍어서 입으로 쏙 넣었다. 그런데 아무리 씹어도 본격적인 맛(킥)이 안 나오고 처음부터 끝까지 밋밋하고 흐릿한 인상이었다. 이건 뭔가 이상한데라고 생각하면서 이번에는 참치마리김밥도 한 개 먹어보았다. 이것 또한 흐릿하고 밍밍하고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혹시나 하고 주위를 둘러봤는데 다들 그냥 묵묵히 먹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구운 계란은 맛이 있겠지 하며 마지막 희망을 걸고 비닐봉지에 두 개 들어있는 달걀 중 하나를 깼다. 아무래도 굽는 조리법이 잘못된 건지 뭔가 질척 질척하다. 껍질을 벗기고 한입 먹자마자 이건 좀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뜨내기손님들을 받는다고 해도 이런 흐리멍텅하고 맛없는 음식을 파는 음식점이 지하철역사에 있어도 되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혹시 내 혀의 컨디션이 안 좋은 건 아닐까 라는 생각과 별 불만 없이 먹고 있는 사람들에게 실례인 것 같아서 조용히 먹던 계란과 김말이를 내려놓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맛이 없는 김말이 몇 조각으로 배가 살짝 찬 것이 슬프고, 정말 별로인 구운 계란 한입에 더 서글퍼졌지만 지하철역밖으로 나가 맞은 선선한 바람이 피부에 닿는 느낌이 좋고,  붉고 부드러운 털을 가진 갑순이라는 커다란 개가 나를 보고 반가워하며(처음 본 모르는 개다) 안아달라고 했기 때문에 기분이 싹 풀렸다. 내일은 맛있는 걸 먹고 싶다.


*하루가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 이렇게 글을 올리다니 반성 좀 해야겠습니다. 그래도 무사히 글은 올렸다는 성취감과 약간의 부끄러움을 안고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두들 안온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이전 20화 간단하게 잔치국수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