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로니에는 안돼요
정성을 다해야 한다. 대충 퉁치려고 들면 지금은 편하겠지만 나중에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울 수 있다. 물론 손에 붙들고 지문이 닳도록 정성을 다해도 놔줄 때를 모르면 그것도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정성을 들이면서도 적당한때 놔버릴 줄 아는 미덕을 길러야 한다. 또한 조급해하지 말자. 모두 나에게 하는 이야기다.
지금 노트북 배터리가 급속도로 방전돼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 성격 급한 나는 10분 간격으로 노트북을 열어하던 작업을 시도하지만 배터리는 빨간색, 시스템은 과부하. 뇌가 깨어있어서 세 시간 정도도 못 자고 일어나 앉았다. 찬장을 뒤져 일용할 양식을 찾아낸다. 맛밤과 아몬드우유. 아몬드우유는 단백질이 강화된 버전이다. 맛밤 패키지의 글씨를 읽어보자. 한 알 한 알 직접 고른 엄선된 100퍼센트 그대로, 저온숙성으로 달콤해진 밤을 자갈에서 구워냈다고 쓰여있다.
실제로 자갈에서 구웠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생각해 보면 밤은 태어날 때부터 한알씩 이렇게 패키지에 담겨있는 존재가 아니다. 봄이 되면 힘차게 물을 펌프질 해 잎을 틔워내고 여름이면 무성하게 나뭇잎을 키워 양분을 만들고 꽃을 피운다.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만들어내는데 밤송이에 알이 꽉꽉 차오른다. 시간이 되면 뾰족뾰족한 밤송이가 절로 벌어진다. 나는 상상 속의 숲을 거닐다 자연스럽게 떨어진 알밤을 주워 손으로 살짝 감싸본다. 어두운 갈색으로 윤이나는 알밤은 반질반질하고 만지면 맨질맨질하다. 이 알밤에는 나무의 겨울부터 봄, 여름, 가을 일 년의 정성이 담겨있다.
그 옆에 더 탐스러워 보이는 알밤이 있다. 얼른 주워 소매에 슥슥닦다가 어디에서 읽은 것이 생각났다.
마로니에 열매였나? 밤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먹으면 독성이 있다던데. 일단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아야지.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맛밤 봉지를 뜯어 밤을 두 개씩 입에 홀라당 집어넣는다. 고소하고 목이 막혀온다. (그래도 고구마보다는 괜찮다.) 두꺼운 겉껍질을 벗기고 쓴맛이 나는 섬유질 같은 속껍질을 처리하고 밤의 온전한 모양을 유지한 채 익혀서 봉지에 담아놓은 식품업체.
나는 고마움에 고개를 두 번 끄떡이며 알밤을 세 개 입속에 털어 넣는다. 프로틴이 강조된 아몬드우유도 두 모금 마신다. 밤나무는 정성을 다해 밤을 만들고 밤송이는 적당할 때 알밤을 놔줄 줄 안다. 조급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기다리다 보면 밤나무의 밤송이는 소중한 알밤을 내어줄지도 모른다. 연휴가 곧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평소와 다르다. 아무쪼록 정성스러운 알밤 같은 시간 보내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