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어김없이 또 부대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국기게양식. 매월 첫째 주 월요일 아침으로 고정되어 있는 이 행사는 군 기강을 확립하고 애국심을 고취하는 차원에서 월 1회 실시하는 행사이다.
그녀는 행사계획에 따라 행사가 시작하기 약 30분 전에 병력들을 연병장으로 집결시킨 후, 훈시대 위에 행사식순을 부착하고, 훈시문을 세팅했다. 특별히 이번에는 최근 큰 훈련이 있어 그 훈련에서 공을 세운 유공자들에게 수여해 줄 표창과 부상 또한 준비하였고, 그들이 해야 할 행동절차까지 숙달시키고 약식으로 예행연습까지 마쳤다. 이제 참모가 와서 군악대와 맞춰 정식으로 최종 예행연습만 하면 모든 준비는 끝나는 참이었다.
참모가 최종 예행연습을 시작했다. 행사 시작까지는 약 20분 정도 남았다. 실제 행사가 시작하면, 사회를 보는 참모는 주변을 돌아볼 정신이 없다. 시나리오에 적힌 멘트와 함께 행사주관자인 사단장의 동선을 체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종 예행연습 때는 상전장교인 그녀가 참모 대신 주변을 둘러보는 눈이 되어 두 눈을 쉴 새 없이 굴리며 사회자의 멘트에 따라 잘못된 부분이 없는지 체크를 한다.
병력들의 제식동작은 규정에 맞는지, 사회자와 성악병의 마이크는 이상이 없는지, 국기에 대한 경례곡에 맞춰 게양병들이 태극기를 잘 게양하는지, 표창수상자들이 행동절차를 잘 숙지하고 있는지의 것들을 말이다.
제식 : 대열을 짓는 훈련을 할 때 쓰도록 규정된 격식과 방식(예, 차렷, 열중쉬어 등)
이 날도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참모의 멘트는 매끄럽기 그지없었고, 훈련 직후라서 인지 병력들도 군기가 바짝 들어있어 제식동작도, 목소리도 어느 하나 지적할 곳이 없었다.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럽고 웅성거리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두리번거리며 '무슨 일이지?' 생각을 하려던 찰나, 내 눈을 의심했다.
'왜? 도대체 왜? 왜 때문에? 사단장님이 여기에 계시는 거지?'
시계를 보았다. 08시 54분, 아직 행사 시작시간인 09시까지 6분이나 남았다. 군대는 시간개념이 철두철미해서 1, 2분 단위로도 사람들이 움직인다. 6분이면 꽤나 긴 시간이다.
원래대로 같으면, 행사 시작 약 3분 전에 예행연습을 마친 뒤 병력들을 최종적으로 준비 및 대기시킨 후 사단장의 모습이 보이면 성우에 버금가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부대차렷!"이라는 멘트로 행사의 시작을 알린다. 그렇게 사단장의 입장과 함께 군악대의 팡파르가 연주되고, 사단장이 지정된 자리에 위치함과 동시에 군악대의 입장곡은 종료된다. 이때, 백여 명의 각 잡힌 부동자세의 모든 군인들의 모습과 그 순간의 정적은 긴장감을 주는 동시에 매번 소름 돋는 장면이 아닐 수가 없다. (요즘 그때의 참모 정도의 레벨이 된 그녀는 행사의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그 순간의 정적을 일부러 길게 잡을 때도 있다. 그래봐야 1초 차이지만. 별 다른 이유는 없다. 그냥 그 순간이 그녀 마음대로 움직여지는 것에 가끔 희열이 느껴진다나?!)
모든 사람의 이목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참모는 여전히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채 시나리오의 멘트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이미 사단장은 지정된 자리에 위치해버리고 말았다.
"참.. 참모님, 사단장님 오셨습니다."
"........."
참모는 잠시 흠칫하더니, 역시나 오랜 경험으로 쌓인 연륜으로 병력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전체 주목, 사회자가 통제하겠습니다. 부대- 차렷!"
병력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지금부터 5월 국기게양식을 시작하겠습니다."
행사 내내 그녀는 이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생각했다. 혼날 일은 나중 문제였다. 왜 사단장이 예정된 시간보다 빨리 왔는지, 왜 매번 오던 사단장의 출발 문자가 이번에는 오지 않았는지.
"이상으로 국기게양식을 마치겠습니다."
다행히 사단장은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 집무실로 돌아갔다.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 찰나, 남의 집에 간섭 좋아하는 여느 사공들의 잔소리로 한숨을 도로 집어삼켰다.
"에이~ 신경 좀 쓰지 그랬어."
"그래도 유 중위 정도면 그 짬에 잘하는 편이야."
"아이고, 어떡하냐? 이따 불려 가는 거 아냐?"
"다음 달에 잘하면 되지."
"원래 이런저런 일 다 있는 거야."
위로 반, 위로를 빙자한 비난 반.
그들이 뭐라 해도 한 귀로 흘려듣던 그녀는 다음 말 한마디에 식은땀을 흘렸다.
"전속부관하고 잘 체크했어야지. 이건 다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야."
항상 잘못을 해도 토닥여주고, 처음이니까 괜찮다던 참모의 첫 쓴소리였다. 같이 임관한 병과 동기들 중 임관성적도, 교육성적도 1등을 했던 그녀는 갓 임관한 초임이지만 업무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더군다나 매번 행사준비 시에는 그렇게 수십 번을 확인하는데, 제 잘못도 아닌 질타에 억울하기도, 화가 나기도 했다.
그녀는 사무실로 돌아와 내선전화의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통신보안. 비서실입..."
"사단장님 오늘 행사시작 시간보다 일찍 나오신 이유가 뭐야?"
그녀는 다짜고짜 전속부관에게 전화해 물었다. 분명 행사 전까지도 그에게 존댓말을 썼던 그녀는 이미 존중 따위 날려버린 지 오래였다.
"... 아, 그게."
"그리고, 사단장님 출발 전에 나한테 카톡이나 문자주는 거 인수인계 안 받았어?"
"죄송합니다."
"너 하나 때문에 나는 나대로 욕먹고. 나는 그렇다 쳐도, 우리 참모님은 어쩔 건데?"
"죄송합니다."
"너 업무 똑바로 해. 남한테 피해 주지 말고."
"죄송.."
뚝!
그의 답변도 듣지 않고, 그녀는 본인이 너 때문에 화가 났다는 것만 잔뜩 전한 채 수화기를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그녀는 절대 그와는 엮이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앞으로 비서실과 연계된 업무는 비서실장과 소통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