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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토리 Oct 13. 2024

한여름밤의 산책

부르지 말라니까

그 행사 이후 둘의 관계는 아주 서먹해졌다. 아니, 오히려 그녀에게 있어서는 서먹할 거리도 없이 공적인 일로 부딪히는 것 외, 그와는 모르는 사람처럼 지냈다. 신경 쓸 것도 없었고 별 상관도 없었다. 어차피, 비서실장 하고만 해도 업무는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고, 매번 전방 GOP로 사단장과 함께 정찰을 나가는 그를, 직접 만날 일 자체는 별로 없었으므로.




무더운 한 여름, 유독 친하게 지내던 선배가 있었다. 어떠한 지시로 인해, 그 선배와 매주 신병교육대대로 출장을 가야 했다. 그 선배는 매우 유쾌한 사람이었고, 유치한 개그에도 후한 웃음을 남발하는 그녀에게 그 선배는 완전 개그맨이었다. 그렇게 둘이 함께 움직여야 하는 업무를 거의 세 달째 진행하고 있다 보니, 자연스레 더욱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업무가 종료되는 날, 유쾌한 선배는 그동안 고생했다며 같은 사무실의 다른 선배와 함께 저녁에 술 한 잔 하자고 했다. 술이라면 빠지지 않는 그녀는 단 번에 오케이 했고, 퇴근 후, 그들은 숙소 근처 자그마한 호프집에서 만났다.


"전속부관도 불렀는데 괜찮지?"

"에에에? 저 걔 싫은데..."

"오늘 사단장님 휴가 셔서 혼자 공관 지키고 있대."

"저 걔 싫습니다. 안 부르면 안 됩니까?"

"왜? 이미 불렀어. 실은 내 고등학교 동창 동생이라 챙겨주고 싶어서 그래."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술 사준다는 사람이 친구 동생이라고 부른다는데 무슨 할 말이 있으랴?!


"맘대로 하십시오. 근데, 전 걔 싫습니다."


마지막까지 그에 대한 싫음을 대놓고 내비친 그녀는 애꿎은 마른안주만 아그작아그작 씹어먹었다.


"충성!"

"왔어? 덥지?"

"앉아 앉아."

"........."


인사하는 그를 은근슬쩍 무시했다.

그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 자리생각을 못했네. 미리 바꿔 앉을걸.'


생각해 봐야 별 수 있나? 이미 벌어진 일. 그녀는  그에 대한 첫인상 하나 때문에 술자리 분위기를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친구는 그 친구이고. 이 자리는 이 자리인 거고. 그녀는 뭐 그녀인 거고. 그렇게 여느 술자리와 다름없는 수다가 계속되었다.


"하하하. 완전 웃겨."

"완전 흑역사십니다."

"야, 넌 왜 그런 얘길 하고 그래."


의외로 술자리는 괜찮았다. 아무래도 동네에서 형, 동생 하던 사이라 그런지 나와 또 다른 선배가 알지 못하는 유쾌한 선배의 흑역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덕에 넷은 깔깔거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새 그에게 데면데면했던 그녀의 태도 역시 온데간데없었다.


"야, 넌 진짜 다시는 그러지 마!"

"죄송합니다. 선배님. 그렇지 않아도 계속 마음에 걸려서 언제 한 번 따로 뵙고 싶었습니다."

"야, 처음인데 좀 봐줘라."

"아, 선배~ 제가 얼마나 혼났었는데."

"앞으로 제가 더 잘 신경 쓰겠습니다."

"그래, 그러니까. 술 한잔하고 풀어. 건배건배~"


렇게 있는 말, 없는 말 다 하다가 그녀가 그를 싫어하게 된 이유마저 튀어나왔다. 그렇게 물 흐르듯 상황도 시간도 흘러갔다.


"너네 같은 방향이지?"

"네! 저희는 슬슬 걸어가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선배, 잘 먹었습니다. 충성!"

"충성!"


선배들과 숙소방향이 다른 그녀와 그는 택시를 타기엔 너무 가까워 걸어갈 수밖에 없는 그 거리를 함께 걷기 시작했다. 한 여름의 밤이긴 했지만, 조용히 부는 바람 덕에 걸어가기에는 참으로 선선한 날이었다.


"제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아니야, 그냥 저기 갈라지는데서 원래 가던 대로 가자."

"제가 조금 돌아가면 됩니다. 그쪽은 가로등도 없어서 위험합니다."

"안 그래도 되는데..."


그랬다. 유쾌한 선배는 매번 그녀에게 너는 여자 아니고 전우라며 놀리곤 했었는데, 그래도 혼자 보내기는 걱정되었는지 가기 전에 그에게 그녀의 귀갓길을 부탁했다. 그녀는 전우를 못 믿냐며 농으로 받아쳤지만, 그는 정말 행동으로 실천하려는 것이었다.


"선배님은 본가가 어디십니까?"

"나? 전북. 너는 춘천이랬나?"

"네! 춘천입니다."

"여기서 춘천까지는 얼마나 걸려? 난 강원도는 한 번도 안 가봐서 잘 모르겠네~"

"두 시간 정도 걸립니다."

"우리 집보다는 가깝네, 세 시간 넘게 걸리는데."


둘이 걸어가는 길에는 도란도란 사소한 이야기가 함께 했다. 도로를 여러 번 건너는 과정 속에 그의 걷는 위치에 따라 그녀는 자연스럽게 도로 안 쪽으로 걷고 있었다.


'내가 너무 오해하고 있었나? 예의도 바르고, 매너도, 성격도 좋고, 되게 착한 거 같네.'


그녀는 술자리부터 걸어가는 것까지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중에 보게 된 그의 예상치 못한 매너 있는 행동들과 몇 마디 스쳤던 교양 있는 대화를 통해 그에 대해 조금은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바래다줘서 고마워. 조심히 가."

"네, 얼른 들어가십시오. 충성!"


그는 그녀가 들어가는 것까지 마저 보고 나서야 제 숙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집에 들어와 하루를 정리하던 그녀는 생각했다.


'사람은 정말 착한 것 같네. 내일부터 이제, 미워하지는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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