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크! 지난 1월 독감에 이어 6월에도 감기에 걸렸다. 면역력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학교 50년 지기 친구 다섯이 변산에 당일 여행을 다녀왔을 뿐이었다. 가는 날 아침부터 소화 문제가 있었다. 친구들이 너, 3kg만 더 찌라, 는 요청을 다발로 쏟아냈다. 노력해 볼게, 했다. 3일 후 감기가 얼마나 시름시름 몸을 힘들게 하는지 저녁, 같이 먹자는 동료에게 말했다.
"내가 배고프지 않은 병에 걸렸어요."
사람은 배가 고파야 음식을 먹고, 에너지를 발휘하게 되어 있다. 배고프지 않은 것은 큰 병이다. 다시 배가 고프지 않았다. 무언가를 먹으면 오히려 배가 아팠다. 다음 날, 특별한 조치로 메디솔라(주)에서 냉동 단백질 식단 10식을 주문했다. 다른 곳곳에서는 소화효소, 유산균, 단백질 음료, 오트밀 등등을 주문했다. 퇴근하여 보니 집 앞에 택배가 무더기로 쌓였다. 쌓인 것만큼 몸에 잘 적용한다면 신체의 면역력이 좀 올라갈까?
정신(영혼)의 면역력은? 면역이 첫째, '외부에서 들어온 병원균에 저항하는 힘'이라면 신체는 음식이나 운동 등으로 다스리는 게 맞다. 둘째, '반복되는 자극 따위에 반응하지 않고 무감각해지는 상태'라면 정신은 매 순간 자기를 내려놓는 것이다. 내 생각이 고집이나 아집이 되지 않는 것, 많은 일에 유연하여 진리와 순리와 다른 의견에 충분히 반응하는 것, 나를 벗어나서 이웃과 하늘로 생각이 열리는 것 말이다. 무뎌짐은 파행이다. 적대감은 나락이다.
내 친구 J는 7명 그룹 친구 중 유일하게 비 크리스천이다. 부모로부터 신심을 받지 않았어도 모두가 기독 안에 살고 있되, J만 아직 요지부동이다. 지방 소도시로 시집가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며 두 아이를 훌륭하게 잘 키워낼 때까지, J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친구들과 형제들은 멀리 있었고, 모두 자기 살기에 바빴다. 그때 긴 세월 25년간 J를 위로하고 지탱해 준 것은 법정(1932~2010)의 책들이었다. 날마다 돈이 없어 앞으로 어떻게 살까,라는 화두가 어깨를 짓눌렀을 때도 법정의 《무소유》가 J에게 자유를 주었다. 내가 기독 안에서 누린 안녕과 자유를 J는 법정의 책 안에서 누린 셈이었다.
J와 내 기독 안식의 결이 얼마나 동일한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내가 처음 누린 안식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J 또한 그러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는 지금 처음보다 더 깊은 평안을 누리며, 나의 미래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다. J는 내가 모르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나 내가 아는 그것만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감히 내 것이 진짜라고 말할 수 있다. 근거는 성서이다.
그 밤, J에게 전화로 진지하게 물었다.
"왜 기독이 싫어?"
"포용력이 없어서. 배타성이 문제야. 다른 것도 인정하면 충분히 설득될 텐데, 자기만 옳다고 해. 왜 자기만 옳고, 다른 것은 틀렸어? 그런 독선이 어디 있어? 그러면서 나쁜 짓하는 사람은 다 거기에 있어. 그게 싫어."
"이해해. 기독교가 종교라면 다른 종교들을 얼마든지 포용하고 악수할 거야. 기독교는 종교의 범주에 있지만, 종교가 아니야. 인생과 생명과 미래에 관한 거야. 그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배타성이 생겨."
"아들이 미션스쿨 다닐 때, 목사가 수업 시간에 신발 벗어서 아이를 폭행했어.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라고 질문하니까 모두 지옥 갔다고 했대. 덧붙여서 그 어린 학생들에게, 지금 너희도 안 믿으면 모두 지옥 간다고 엄포했다네. 아들이, 지금도 기독교, 하면 학을 떼잖아."
"신의 영역을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닌데, 상처받을 만했네."
J의 속내를 들으니, 기독교 안의 따뜻한 온도와 밖의 찬 공기를 새삼 절감했다. 인생 후반 삶의 많은 것을 공유하고 살아도 J에게 단 한 푼어치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이 가슴 아프고, 미안했다.
"질문 하나 더 하자. 지금은 네가 힘이 있어 네 의지로 이 삶 저 삶 잘 꾸리지만, 힘이 없어졌을 때는 어떻게 할래? 죽을 때 괜찮을까? 지금의 안녕을 그때도 누릴까?"
"그건 죽을 때 지옥 갈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 얘기지. 난 지옥을 모르니까 상관없어. 죽음이 두렵지 않아."
"정말 그날이 와도 그럴까? 불교가 종교라고 하지만, 아니야. 철학이야. 신도, 미래도 없어."
"난 그게 좋아서 한 번씩 절에 갔어. 신도 중요하지만 나는 매일을 살아야 하는 사람이거든. 아침에 일어나서 밥 하는 것, 내가 하지 신이 해 주지 않아. 내가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 도움을 받았으면 그것으로 족해. 기독교는 좋은 일은 다 신의 은총이고, 나쁜 일은 다 자기의 잘못이더구먼. 그것도 싫어. 고생은 내가 다 해 놓고 왜 좋은 일은 신에게 돌리고, 나쁜 일은 내 탓이어야 해? 이해가 안 돼."
내가 멈칫했다. J가 크리스천들에게서 느끼는 거부감이 니체의 항변과 같았다. 그로 인해 니체는 신을 죽였다. 크리스천의 신심을 극도로 혐오했다. 대신 그 자리에 초인을 세웠다. 하지만 과연 신이 그런 존재인가? 그렇게 나약한 사람들만 만드는가? 아니다. 좋은 결과든 나쁜 결과든 신은 똑같이 영광 받고 지지한다. 다만 구도자의 신심과 인식이 니체에게, 혹은 J에게 맹종과 순응적인 우매한 집단으로 비칠 뿐이다.
J의 일정 때문에 20여 분 만에 전화를 끊었다. 크리스천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살면서도 J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울적했다. J에게 천하의 유일한 신을 무엇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 배타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성서가 J의 귓가에 어떻게 닿게 할까? 조금도 감동 주지 못한 이 삶을 어찌해야 하나! 늦은 밤, 잠자리에 들려고 하니, 펜이 저절로 J에게로 향했다.
"내가 살아가면서 언제 내 것이 네 것보다 더 좋다고 말한 적 있니? 말할 것도 없이 네 것은 내 것보다 항상 더 좋고 멋졌어. J야, 딱 하나, 이것만은 내 것이 네 것보다 좋구나. 성서가 세계 베스트셀러라는 것은 알고 있지? 성서를 읽어 줘. 반대하기 위해서라도 좋아. 마음먹으면 직장 생활 중에도 한 달이면 다 읽을 수 있어. 필요할 때 바로 말해. 기다릴게. 너의 성서를 주문하다가 동의가 없으면 애물이 될 것이므로, 멈추고 말하는 거야. 한 번만 네 것 말고, 내 것에도 마음을 담아 줘. 고마워. 사랑해. 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