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전문학에 빠져 있던 십 대 후반, 고전문학의 작가와 작품의 배경이 많은 경우 '기독교'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가난'이 여러 가지 면에서 경쟁력을 잃게 한다고 억울해할 때였는데, 기독교를 모르는 것도 언뜻 결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서를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게 그때였다. 하지만 성서는 방대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읽어야 할지, 막막했다. 몇 번을 시작했으나 잇지 못했다. 잘 모르는 사상집도 마구 읽어 내리던 시절이었음에도 성서는 오지로 남았다.
20대 초입, 교회 출석을 재개하고 6개월 되었을 때, '성서는 일주일이면 다 읽는다.'라는 목사님의 말이 내 안에 각인되었다. 일주일이면 다 읽는 것을 여태껏 못 읽다니. 도전하고자 열망이 생겼다. 그다음 주 월요일 아침, 성서를 들고 집을 나섰다. 그 시절에는 기도원이 어디든지 열려있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기도원을 찾았다. 집회 기간인지라 사람들이 많았다. 금식을 다짐하고 성서를 읽기 시작했다. 하루에 두 차례 아침과 저녁 예배에 참석하는 것 외에는 오로지 성서만 읽었다. 금식한 것은 경험과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왕이면 명료한 정신으로 성서를 읽고 싶었다.
성서는 나만 들을 수 있는 작은 소리로 낭송하며 읽었다. 성서의 글자를 하나도 빼놓지 않겠다는 다부진 각오였다. 장소는 그저 누구나 앉을 수 있는 성전 의자의 한구석, 창가였다. 이를테면 군중 속에서 내 최초의 성서 읽기가 읊조림으로 시작된 것이다. 자고 읽고, 자고 읽고, 또 자고 읽고…. 가장 지루했던 것은 레위기 읽기였다. 가장 눈이 아팠던 때는 예언서 읽기였다. 좋지 않던 안질이 눈에 무리를 주어, 낮에도 꽤 많은 시간을 눈 감고 쉬어야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힘들어서 엎드려 곤히 잠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자고 있으면 얼굴과 귓가를 간지럽히는 부드러운 터치가 어김없이 나를 깨웠다. 몇 번이나 있었다. 그것은 천사의 그것처럼 부드럽고 상쾌했다. "네, 다시 읽을게요." 나도 모르게 신과 대화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마침내 토요일 오전, 신·구약 성서를 낭송으로 다 읽었다. 일주일이 아니라 5.5일 만에 다 읽은 것이다. (그 후 한 주간 동안 덤으로 받은 약속과 확신과 즐거움에 대해서는 지극히 사적이므로, 뚜껑을 열지 않는다.)
성서를 읽는 것은 '신을 대면하는 것'이다. 또한 '신을 경험하는 것'이다. 하여 '구원받는 것'이다. 미처 의식하지 않고 읽을지라도 신은 성서라는 구원의 드라마 글자 속에 숨어 있다가 적 때에 말을 걸어 그대를 구원한다. 성서를 읽은 그대는 이미 구원선(船)에 올랐으니까. 따라서 나는 말한다. 언제라도 성서를 읽어라. 그냥 무심코 넘기면서 단번에 읽어라. 후에 애정이 가면 꼭 같은 방법으로 두 번 더 읽어라. 도합 세 번을 운운하는 것은 경험에 의하면 처음엔 산이, 다음엔 숲이, 그다음엔 나무가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더 관심을 가지면 성서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정확한가를 알게 된다. 1,600여 년 동안 40여 명의 저자들이 각기 다른 시대, 시각, 개성으로 기록했어도 누가 불러주어 쓴 것처럼 일관성을 가졌다는 것도 발견한다. 무엇보다 성서에서 사람의 본성과 자연과 미래가 보이니, 겸손과 안락이 따른다.
그러므로 그대는 일단 성서를 읽어야 한다. 아직 교회를 안 나갔다면 더 빨리 성서를 열어야 한다. 그것은 음식이 있으면 먹어야 맛을 아는 것과 같다. 아무리 많은 정보를 알고, 들어도 먹지 않으면 어떤 맛도 알 수 없다.
'기독교의 대부'라고 불리는 어거스틴(북아프리카 타카스테, 354~430)은 어머니의 기독교 믿음을 따르지 않고, 이단과 철학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 31세의 어느 날, 무겁고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밀라노의 한 정원에 앉아 있었다. 어린아이 노랫소리가 들렸다. "집어라, 읽어라." 곧장 집에 가서 성서를 펴서 읽었다. 로마서 13:13~14이 그에게 천둥으로 임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때 그는 더 이상 지금까지의 그가 아니었다. 그의 《고백록》 8권에 의하면, 성서 말씀의 끝이 그에게 닿자마자 그의 내면을 사로잡던 어둠이 사라지고, 마음에 빛과 평화가 깃들었다.
존 번연(영국, 1628~1688)은 거친 환경에서 자란 탓에 말과 행동이 매우 난폭했다. 신성모독적인 말도 서슴지 않았다. 어느 날 상점 진열장 앞에서 한 여인으로부터, '평생 들어본 것 중에서 가장 심한 욕을 하는 사악한 녀석'이요, '마을의 젊은이들을 모두 망친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그런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그때의 모습을, 자서전이라고 칭하는 그의 책, 《죄인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심정현 옮김. 미스바북스, 2020)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경건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을 보기만 해도 나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는 것처럼 답답했다. 그럴 때면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나를 떠나소서. 내가 주의 도리 알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나이다."
세월이 흘러 경건한 아내의 영향을 받고 성서를 읽다가, 히브리서 12:17에 충격을 받았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그럼에도 이후 또 많은 시간, '죄가 커서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을 정죄하며 미지근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요한복음 6:37을 읽고서야 해방의 기쁨을 얻어 회심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천로역정》은 그 후 그가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 12년간 투옥 생활 하던 중, 그의 방탕과 회심을 응축하여 써낸 보물이다.
아, 아무리 그렇더라도 내로라하는 수재들의 이야기는 멀게만 느껴진다. 범재들에는 범인의 말들이 더 가깝다. '성서 읽기'라는 말을 인터넷에 넣고 검색해 보라. 아니면 AI에 물어보라. 수많은 보고가 쏟아질 것이다.
"걱정 근심이 사라졌어요"
"정상수면을 해요"
"용서했어요"
"산천초목이 다르게 보여요."
"아기를 가졌어요."
…
성서를 연구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저 단순하게 읽어라. 조금이라도 매일 읽어라. 얼마간이라도 단번에 읽어라. 그대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