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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창민 Jul 04. 2024

한솔맨션

내 삶에서 아파트는 #6

중,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집의 이름은 '한솔맨션'이었다. 무려, 맨션이라니.


그땐 맨션의 의미를 몰라, 사전을 찾아봤다. mention이 있고 mansion이 있다. 헷갈린다. 영어 원어민이면 발음의 차이가 분명했겠지만, 중1 때 줄 그어진 영어 공책에 abcd를 수십 번 쓰는 숙제로 영어를 처음 접한 난, 두 맨션의 의미와 발음을 구분하지 못했다.


mention은 말, 언급을 뜻한다. 그러니, 한솔맨션의 그 맨션은 아니다. 한솔맨션의 맨션은 mansion이다. 맨션은 저택, 주택이라는 말이다. 뉘앙스로 봤을 땐, 귀족들이 사는 대저택을 말하는 거 같다. 그렇다면 한솔 대저택이라니, 집에 비해 이름이 참 거창하다. ‘나도 좋은 집이다’, 부끄럽지만 얼굴 발그스름하게 과시하고 있는 듯하다.


아파트라는 말도 그렇다. 영어로는 apartment라고 하는 아파트는 영국과 미국에서는 저렴한 임대아파트를 말한다고 하는데, 한국에 와서는 신식으로 지어진 좋은 주택이라는 의미로 변모했다. 콩글리시 외래어로 쓰이면서 뭇사람들이 흠모하는 고급이 됐다.


2024년 6월 지금 한솔맨션의 모습. 왼쪽 태극기 있는 건물이 작은 도서관이다. 네이버지도에서 캡쳐했다.




한솔맨션은 이름답지 않게 아담한 시골의 작은 아파트였다. 읍내 중에서도 좀 떨어진 외곽에 입지했다. 집 주변은 온통 자연이었다. 내성천으로 이어진 냇가가 흘렸고 그 냇가에는 읍내 사람들에게 식수를 공급하기 위한 취수장이 있었다. 상수원보호구역 같은 곳이었고, 집 바로 옆이 정수장이었다.


주말이면 냇가 뚝방길을 따라 쭉 걸어가, 어느 산등성이 밑에서 약수를 떠 왔다. 그때는 약수를 매주 통에 받아서 마셨다. 부모님이 시킨 일이다. 밤에 뚝방길을 따라 이리저리 걸었다. 냇물 조르르 소리와 귀뚜라미 찌르르 소리가 정취를 풍겼다.


여름에는 냇가 어딘가 눈에 보이진 않지만 수천 마리쯤 돼 보이는 개구리들이 울어대는 개굴굴 소리가 시끄럽지만 정겹게 들렸다. 종종 물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 먹었다. 겨울에는 허옇게 언 얼음 위에서 썰매를 탔고, 무심히 돌을 던져 얼음 위에 흔적을 남겼다.     


냇가 뒤로는 산봉우리가 지천이었고, 멀리 북쪽으로는 소백산이 길게 우뚝했다. 여름에는 유독 검게 푸르렀고, 겨울에는 눈이 쌓여 하얬다. 누군가 소백산에서 위로 뛰어오르는 호랑이를 멀리서 봤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했다.


냇가의 반대쪽, 그러니까 아파트 입구 앞에는 전부 논과 밭이었다. 논에서는 벼가, 밭에서는 고추나 호박, 상추, 파, 감자 따위가 자랐다.




한솔맨션은 5층 높이 3개 동으로 구성됐다. 하늘로 뻗은 현란한 모습이 아니라, 땅을 기준으로 옆으로 뻗은 길쭉하고 낮은 아파트였다. 아파트라고 부르기 민망해서 맨션이라고 이름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엘리베이터는 없다. 걸어서 5층을 다니는 것이 당연했다. 백 가구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우리 집은 입구 바로 앞, 맨 끝줄 2층 208호였다. 엄마는 겨울마다 우리 집이 맨 끝이어서 외풍이 있다고 말했다.


한솔맨션은 이름에서 느껴지는 솔이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외벽은 노랬고 지붕은 갈색이었다. 노란 페인트에 한솔맨션이라는 한글이 꺼멓게 박혀 있다.


수업이 끝나고 감청색 교복을 입고 읍내를 가로질러 집으로 가는 길. 허름한 구멍가게에 들러 새콤달콤 젤리를 사 먹고는 작은 집들이 줄지어 있는 짧은 골목길을 굽어 지나면, 논밭이 보인다. 논밭 사이로 외롭게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가며, 눈동자를 멀리 두면 벽에 붙은 한솔맨션이 보인다. 집이다. 다 와 간다, 안도한다. 그러니 집이다.


좋았던 건, 한솔맨션 바로 옆에 도서관이 있었다는 거다. 종종 도서관에 갔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시험 기간이면 칸막이 자리에 공부하러 갔고, 1층 서가에서 읽지도 않을 책을 이리저리 구경했다. 그래도 그중 몇 권은 읽었던 거 같다. 도서관에 갔다는 것만으로도 약간의 만족감을 느꼈다.


이름 거창했던 아담한 한솔맨션은 지금도 여전히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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