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창민 Jul 02. 2024

타지의 아파트

내 삶에서 아파트는 #4

부모님은 인삼과 사과 농사를 지었다. 땅만 보며 열심히 일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줄곧 농사만 지었다. 농부가 천직이다.


90년대 중후반, 부모님은 농사로 돈을 좀 벌었다. 5년 키운 인삼을 팔았고, 사과도 좋은 상품으로 도매인에게 넘겼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한때 부모님은 약간의 돈을 만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일확천금 정도까지는 아니다.


돈으로 아버지는 타지의 아파트를 샀다. 경기도 남부 끝자락에 있는 어떤 작은 도시였다. 당시 삼촌이 그 도시에 살았다. 삼촌이 아파트 매입을 연결시켰다. 수천만 원이었던 것 같다.


옛날 마포주공아파트 항공사진이다. (사진출처: 국가기록원)


아버지는 시골 출신 까막눈이다. 투자가 뭔지 아파트가 뭔지 시세가 얼마인지 알지 못한다. 번 돈을 어디에 넣어서 불리고 싶은 욕구는 있었다. 아버지는 동생인 삼촌을 통해서 듣고 결정했다. 아버지는 삼촌의 권유를 받고, 삼촌에게 돈을 보냈다. 삼촌이 아파트 사는 걸 중개사와 함께 중개했고, 아버지는 믿고 맡겼다.


소도시의 아파트는 비싸지 않았다. 대도시가 아니었고, 도농복합 도시였다. 아버지는 농사일로 번 돈의 일부를 먼 도시의 아파트를 사는 데 기꺼이 투입했고, 연결고리로 그곳에 사는 동생을 활용했다. 동생이 아니었다면 그곳에 아파트를 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동생도 형으로부터 일부 이득을 얻어갔다.


아버지는 정확히 그 아파트가 얼마인지 모르고 돈을 보냈다. 보내라고 하면 몇 번씩 보냈다. 듣기로는 집값보다 더 많은 돈을 보냈다. 엄마는 저어하며 만류하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동생에게 보내는 게 어때서’라며 기어코 보냈다. 동생을 도와준다는 생각, 동생을 믿는다는 신뢰감, 도시의 아파트를 매입한다는 기대가 뒤섞인 감정이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5학년이었다. 마침, 담임선생님이 아버지가 아파트를 산 그 지역에서 우리 학교로 전근을 왔다. 외지에서 전근 온 여성 선생님이라는 특징으로, 선생님은 시골에서 관심을 많이 받았다. 세련된 선생님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1년 만에 떠나온 그 지역으로 다시 돌아가게 됐다. 5학년 마지막 수업시간, 떠나는 날 선생님은 울었다. 친구들도 많이 울었다. 아쉬웠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방학식 하는 날이라, 급식으로 빵과 우유가 나왔다. 운 선생님은 차마 먹지 못하고, 빵과 우유를 나에게 줬다.    

 

“선생님, 부모님이 거기에 아파트를 샀어요. 거기로 이사 갈게요.”   

   

열두 살 어린이는 호기롭게 말했다. 나의 마지막 인사였다.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는 못했다. 선생님 잘 계시죠?     




아버지는 아파트를 사고 전세를 놓았다. 지금으로 치면 ‘갭투자’를 한 것이다. 갭투자는 누가 알려줘서 한다기보다는, 예전부터 누구든 자연스럽게 터득한 투자 또는 투기의 방식이다. 오를 것으로 예상되는 아파트를 사는 데 돈이 부족하다. 집을 사는 동시에 전세 살 사람을 구해 전세를 놓는다. 그러면 직접 투입하는 자금이 줄어든다. 상식이다. 한국에서만 존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갭투자 자체를 두고 비난하긴 어렵다. 다들 그렇게 집을 샀고, 전세를 통해 주거 사다리를 만들었다. 다만 부작용도 있다. 최근에도 갭투자로 집값이 폭등하거나, 전셋값이 급등하거나, 전세사기와 역전세로 세입자가 고통받는 일이 많이 발생했다. 필요한 전세제도가 악용된 경우다.


나는 경기도 남부 소도시의 아파트가 최종적으로 얼마 올랐는지 알지 못한다. 그곳에 가본 적도 없다. 아버지는 그 아파트를 내가 고등학교 졸업할 즈음 팔았다. 7년 정도 보유했다가, 그곳에 오래 살던 세입자에게 팔았다. 얼마의 차익을 거뒀는지도 알지 못한다. 90년대 중후반 경기권 소도시의 아파트 시세로 추측해 볼 때, 그렇게 많은 차익을 거둔 것 같지는 않다. 


수많은 사람이 부동산을 사고판다. 진짜 필요해서 사고파는 사람도 있지만, 순전히 투자 또는 투기 용도로 사고파는 사람도 많다. 돈을 벌고 자산을 불려, 가족을 먹이고 삶을 풍족하게 한다. 욕구와 욕망을 채우기도 한다. 그렇게 살아왔다. 올라가는 땅값과 집값에 올라타지 못한 사람이 못난이가 되기도 했다. ‘벼락거지’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지금은 만나지 못하는 삼촌과 나는 가보지 못한 한때 부모님 소유의 아파트, 선생님이 온 곳인 그 아파트가 있는 그 지역. 어릴 적, 그 아파트와 연관된 인연이 지나갔다. 

이전 03화 열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