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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창민 Jul 10. 2024

희미한 긁힌 자국

내 삶에서 아파트는 #11

처음엔 반지하, 다음은 2층, 그다음은 1층이었다. 엄밀히 1.5층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H동을 나와 S동으로 이사 갔다. 누나 회사 근처였기 때문이다. S동은 남성역과 이수역이 놓여 있는 넓은 동네였다. H동 다가구와 비슷한 연식과 비슷한 모양, 비슷한 넓이로 만들어진 비슷한 다가구 주택으로 몸을 옮겼다. 층수만 달랐다.


나는 S동에서 살면서, 다행히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4학년은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공간은 아니다. 군대까지 합치면 7년이 넘는 대학이라는 울타리를 떠나, 스스로 직업을 구하고 스스로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게 어려웠다. 처음 해보는 일 아닌가. 두려웠다. 


일단 직업을 구하는 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이리저리 공부하고 시험 보고 원서 넣고 하다가, 기업 한 곳에 일자리를 구했다. 운이 좋았다. 취업은 확률 게임이라더니, 졸업하기 두 달 전에 3차 면접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첫 사회생활이 시작됐고, 현장에 많이 다녀야 하는 업무이다 보니 차가 필요했다. 운전면허증은 스물두 살에 따놓았는데, 차를 몰아본 적은 없다. 비싼 차, 새 차를 살 엄두는 내지 못하고, 중고차가 즐비한 창고형 중고차 매장에 가서 눈대중으로 샀다. 돈에 차를 맞췄기 때문에 선택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청록색 대우자동차 라세티였다. 현대자동차보다 이백만 원 정도 쌌다. 그래서 색깔도 보지 않고 낙점했다. 첫차를 몰고 지금은 아내가 된 여자친구를 옆에 태우고 창고 매장을 나왔다. 교외로 나가고 싶었다. 양평 어디였는지 내비게이션도 없이 달렸다. 겁이 많던 나는 속도를 못 냈고, 뒤차가 빵빵 거렸다. 좌회전을 해야 하는데 지나쳤고, 우회전을 해야 하는데 보지 못했다. 두 시간 몰았을까, 풀이 잔뜩 나 있는 한적한 공터에 차를 억지로 세우고 휴, 한숨을 몰아쉬었다. 옆자리 여자친구도 휴, 웃었다. 


차는 샀지만, 서툰 운전에 꼭 필요할 때만 몰았다.



서울의 흔한 다가구 골목길


이수역에서 남성역 방향으로 가다가 큰 도로에서 좌회전해서 작은 골목으로 들어서면 이면도로다. 이면도로로 몰아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다가 왼편 더 작은 골목으로 들어서면 집이 나왔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골목은 좁아졌다. 


차를 담장에 긁히거나 안 걸리게 하려면, 차 꽁무니로 들어가야 한다. 내비게이션은 사서 달았지만, 후방 카메라는 존재 자체를 몰랐던 시절이다. 양쪽 백미러를 보고 고개를 돌려 가늠하거나, 그것도 어려우면 내려서 직접 보고 왔다 갔다 하길 몇 분. 차 꽁무니를 골목 안쪽으로 조금씩 몰아 후진하다가 왼편으로 돌리고, 건물 옆구리와 나란히 맨 뒷 공간에 차를 대면 끝이다. 건물 옆에 차가 이미 있을 때는 그 차 앞 또는 집 앞 구석에 댔다. 이런 공간이라도 있으니 그게 어디냐. 이조차 없었으면 차는 굉장한 골칫거리였을 거다.


청록색 작은 차를 대놓기에 주차공간은 비좁았다. S동 집은 1층을 주차장으로 만들지 않아도 되는 건축법이 적용되던 시절에 시공된 3층짜리 다가구 건물이다. 주차장이 있어야 할 곳에는 반지하방과 우리 셋집이 놓여 있었다. 주차는 건물 옆 비좁은 공간에 일렬로 두 대를 댔고, 골목 끝 집 앞에 또 두 대를 나란히 댈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필요할 때에만 차를 썼는데, 맨 뒷칸에 오래 대놨던 탓에 차 사용을 포기할 때가 많았다. 차를 맨 뒷칸에 계속 두는 게 속 편했다.


웅웅 웅웅, 하루는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이 마찰음을 냈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혹시나 받았다.


“차를 긁었는데 어떡하죠?”

“아 네..”

 

같은 다가구에 사는 다른 세입자였다. 옆집 사람이었는지 위층 사람이었는지 그랬다. 어떻게 해야 할지, 순간 멍했다. 처음 겪어보는 일, 사회초년생은 당황했다. 이래서 보험을 드는구나 싶다가도, 누가 어떻게 뭘 보상하는 건지 감이 잘 안 왔다.


“이따가 가서 볼게요.” 전화를 준 게 고마웠다. 그냥 지나쳐도 몰랐을 텐데.


차는 값싼 중고차였다. 색깔도 잘 안 팔리는 인기 없는 색이어서 더 쌌다. 차는 잘 나갔지만, 이미 긁히고 쓸린 자국이 많았다. 좀 긁혔다고 티도 안 난다. 이웃집 사람이 차를 몰고 나가다가, 차 허리로 내 차 앞 범퍼를 긁은 모양이다. 청록색이 아닌 흰색 페인트 같은 게 약간 묻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손으로 툭툭 털어내니 그마저도 더 희미해졌다. 전화 준 이웃에게 별문제 없을 거 같다고 전화했다. 그렇게 긁힘 사건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낡은 다가구 주택의 가장 불편한 점이 주차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파트로 더 몰린다. 한 가구에 차 한 대 이상인 현실에서, 주차는 민감하다. 주차 문제로 승강이하는 골목 풍경도 흔하다. 오랜 주택가, 오랜 다가구에서는 차 댈 곳이 부족하다. 요새는 1층에 주차장을 마련하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못했다. 건축물이 변하는 속도보다, 자동차 증가 속도가 몇 곱절은 빨랐다.


다가구는 주차장이 있다 해도 이중주차를 할 수밖에 없다. 차를 대고 뺄 때마다 앞뒤에 있는 차를 다음날 쓸 건지 서로 확인해야 하고, 뒤차를 뺄 때에도 앞차 번호로 전화해 부탁해야 한다. 급히 차를 써야 하는데, 앞차 주인이 멀리 출타 중이면 차는 쓸 수 없게 된다. 어쩔 도리가 없다.


흔치 않던 청록색 차는 4년을 더 탔고, 시골에서 엄마가 몇 년 더 몰다가 폐차했다. 희미하게 긁힌 자국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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