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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창민 Jul 12. 2024

"우리가 들어갈 곳은 있을까"

내 삶에서 아파트는 #12

남산은 산책과 등산 어느 사이에 있다. 산책하기도 좋고, 짧은 등산을 하기에도 좋은 공원 같은 산이다. 학교가 남산 근처에 있어서, 바람을 쐬고 싶을 때면 남산에 자주 올라갔다.


늦은 오후 친구가 학교에 왔다. 시골에서 같이 고등학교를 나와, 서울에도 같이 올라온 친구. 걷기 좋아하는 친구에게, 제안했다. 여기로 올라가서 꼭대기에서 한강 보고 명동 쪽으로 내려가자.


남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늦여름이었던 거 같다. 벚꽃은 이미 지고 없었다. 남산은 특히 초봄이 예쁘다. 남산에는 벚꽃이 지천이다. 산책로를 따라 피기도 했지만, 산 곳곳에 자생하는 벚꽃도 많다. 걸으면서는 나무 밑동에서 벚꽃을 올려다보는 게 보통이지만, 남산 맨 위에서 내려다보면 몽글몽글 뭉게구름처럼 벚꽃이 산등성이에 떠 있다. 예쁘다.


남산의 벚꽃은 참 예쁘다. 산속에 막 핀다.(출처: numberofpeople님의 블로그)


벚꽃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산책로를 따라 편안히 걷다 보면 국립극장 지붕이 보인다. 산책로로는 더 이상 가지 않고, 위로 방향을 잡는다. 이내 등산로다운 길이 나온다. 가파르지는 않지만, 남산도 엄연히 산이다. 돌이 있는 흙길을 따라 담소를 나누면서 걷다 보면, 땀이 콧등에 몽글몽글 맺힌다. 숲이 좀 더 우거질수록 옷에서 나는 땀냄새보다는, 소나무에서 나오는 향긋한 냄새나 활엽수 냄새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약간 숨을 몰아 30분 정도 걸었을까, 정상으로 올라가는 큰 길이 나온다. 마을버스에서 사람들이 내리고 탄다. 왼쪽에는 낮은 성곽도 보인다. 다 왔네. 가파른 아스팔트 길을 사람 따라 좀만 더 오르면 남산타워다.


남산에는 자주 왔다. 운동하기에도 산책하기에도 편했다. 평소에는 남산 꼭대기까지 갈 일은 없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답답할 때면 잠시 나와서 남산 길을 걸었다. 후배와 걷기도 하고, 혼자 걷기도 했다.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 걸으면 머리가 가벼워졌다. 새내기 때는 봄에 동기들과 파전과 막걸리를 사서, 남산 길에 마구 앉아 파전에 막걸리를 마시기도 했다. 벚꽃 나무 아래였다. 수업을 듣기에는 봄날이 너무 좋았다.




잠깐 앉았다 갈까. 저기 가기 전에 잠깐 쉬자. 목적지에 가기 전에 잠깐 앉았다. 서울의 북쪽이 보였다. 남산 바로 아래에서부터 멀리 인왕산과 북한산 사이로 휘황찬란한 건물과 상가, 아파트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참 많다. 어스름 녘 서울에는 불빛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남산타워에서 보이는 서울 야경. 수많은 불빛 중에 우리가 갈 곳은 있을까.(출처: 남산타워 소개 네이버홈)


저쪽으로 가보자. 남산타워 아래 나무데크에 가면, 난간에 자물쇠들이 잔뜩 붙어 있다. 무게를 견디고 있는 난간을 짚고 시야를 넓히면, 서울의 남쪽이 보인다. 미군 부대 같은 부지와 건물도 보이고, 천천히 흘러가는 거 같으면서도 호수처럼 멈춰 있는 긴 강이 보인다. 굽이굽이 길기도 하다. 초록색이 짙어 거뭇하게 보인다. 강변에는 실제로는 높겠지만, 여기서는 작게 보이는 아파트들이 빼곡하다. 강 따라 참 많기도 하다.


저렇게 많은 건물들 중에 우리가 들어 곳이 있을까.” 친구에게 뜬금포를 날렸다. 친구는 웃어 보였다.


“그러게.” 친구는 더 대답하지 못했다.




큰 사각형 모양에 작은 사각형 불빛 수백 개가 모였다. 사각형에 사각형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사각형들이 모여 사각형이 된 아파트. 사람들이 살고 먹고 자는 집. 몇 년 머물렀지만 여전히 낯선 도시 서울. 이제 졸업을 준비하는 스물몇 살의 이방인이 품기에는 멀고 먼 나라의 이야기 같은 서울의 집.


우리가 갈 곳이 있을까. 갈 곳이 없다는 아쉬움이었을까, 갈 곳이 있어야 한다는 의지였을까, 갈 곳이 없을 거라는 자조 섞인 말이었을까. 친구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질문 같으면서 질문 아닌 말에 웃음기로 공감해 준 게 고마울 따름이다.


명동 아래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내려가는 길은 한결 마음이 놓인다. 올라간다는 부담보다는 내려가서 저녁에 술 한잔 하면 된다는 안도감이 있다. 친구와 나는 명동과 충무로 어디께 허름한 식당에서 땀을 식히고 허기를 달래기로 했다.


내려오는 길, 오른편 봉수대 사이로 보이는 서울 아래를 다시 훑어본다. 허옇고 누렇고 뻘건 불빛들이 아까보다 더 늘었다. 내가 들어갈 불빛은 어디일지 찾아보기라도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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