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장 오사주 Oct 15. 2024

50대 아줌마의 꿈, 뮤지컬 스타

나이: 50대 후반 성별: 여성 직업: 전업주부

고민: 50대 아줌마가 주책일까요?



뮤지컬에는 딱히 관심이 없다. 만 원이면 볼 수 있는 영화와 달리, 뮤지컬 티켓은 10만 원을 웃도니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런 내가, 뮤지컬 <킹키부츠>에서 여장을 하고 밤무대에 서는 주인공 ‘롤라’의 무대를 패러디한 ‘쥐롤라’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엄청난 인기 때문인지 나한테까지 흘러온 것이었다. 너무 재밌어서 100번이나 되돌려봤다. 급기야 롤라 역할을 맡았던 모든 남자 배우의 영상까지 찾아봤다. 관련 영상을 계속해서 클릭해서였을까? 유튜브는 다양한 뮤지컬 장면을 보여줬다. 그중 <시카고>의 All that Jazz 무대 모음 영상을 보고 또 봤다. 다양한 여배우들이 그 노래를 불렀는데 박칼린과 인순이의 무대가 가장 인상 깊었다. 완숙함에서 나온 깊은 울림이 있었다고 할까?

이런 목소리를 내고 싶은 50대 어머님이 있었다. 이분은 처음 사주 상담을 신청할 때 무엇이 궁금한지 예약지에 적지 않으셨다. 생년월일을 보니 올해 무언가를 시작하는 사주였다. 상담이 시작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재작년부터 고민하고 꿈꿨던 무언가를 올해 시작하시려나 봐요?"

"아… 아니요?"

분명 뭔가를 시작하고 싶어 하는데 아니라니. 식은땀이 났지만 침착하게 다시 물었다.

"그럼 무언가를 위해 공부하고 준비하셨나요?"

"아닌데요?"

이번에도 아니라니. 이럴 때는 잘난척하지 말고 그냥 물어봐야 한다.

"그럼 뭐 때문에 사주 상담 신청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제 적성이 궁금해서요. "

사주를 들여다보니 내 안의 무언가를 화려하게 드러내고 펼치기를 원하는 분이다. 자식도 낳고 어느 정도 키우셨을 거 같은데 뭘 하고 싶으신 걸까? 이러한 생각을 내담자에게 전달하며 떠오르는 것이 없느냐 물었다.

"아… 사실 제가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은데 잘할 수 있을까 고민이라서요."

"언제부터 고민하셨어요?

"재작년에 뮤지컬을 보고 와서부터 자꾸 생각나더라고요."

뭐야, 재작년부터 고민한 거 맞잖아? 억울한 마음에 "아까랑 얘기가 다르잖아요!" 하며 장난스러운 투정을 부리자 "아, 제가 그랬나요?" 하며 머쓱하게 웃는 어머님이었다.


어머님은 20대 초반에 결혼해 육아와 살림을 병행하셨다고 한다. 한 번도 자신에 대해 돌아볼 시간이 없었는데 자식들이 모두 독립하고 나니 '나'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뮤지컬을 보고 나서 무대에 서고 싶은 생각이 꿈틀거렸지만 남들이 주책이라 할까 봐 속앓이만 해오셨단다. “사주를 보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오사주님도 제가 주책인 것 같으세요?”

어머님의 사주와 비슷한 다른 사람이 떠올랐다. 그건 바로 올해 유튜브를 시작한 방송인 최화정. 그녀는 어린 나이에 방송에 데뷔해 지금까지 다양한 작품에서 얼굴을 알렸다. SBS가 개국하며 라디오 방송을 시작할 때 제일 먼저 스카우트 해온 사람도 최화정이다. 그녀가 맡은 파워타임은 SBS 대표 간판 라디오 프로그램이고 20년이나 인기를 끌다 올해 막을 내렸다. 그녀와 얘기해 본 적은 없지만 사주를 봤을 때 아마 재작년부터 라디오 하차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물러남에 대한 아쉬움, 앞으로에 대한 두려움, 거기에 막막함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나를 불러주는 곳을 기다리는 대신 스스로 방송하는 유튜브를 시작했다. 결과는 대박. 올해의 유튜버 중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제일 많은 구독자를 모은 게 최화정 씨다.

이 얘기를 어머님께 들려주며 All that Jazz에서도 누구보다 깊은 감명을 주는 건 인순이와 박칼린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자기가 본 뮤지컬이 <시카고>인걸 어떻게 알았냐면서 깜짝 놀셨다. 나는 그녀에게 더 큰 용기를 주고 싶어 노래 한 구절을 뮤지컬 배우처럼 불렀다. "저는 움~하, 움~하, 하면서 All That Jazz를 부르는 어머님의 모습도 보입니다." “정말로요?” 격양된 목소리에 기대가 한가득 묻어났다. “네, 그럼요."


며칠 뒤 한 통에 메시지가 왔다.

“오사주님, 저 뮤지컬 연기 학원에 등록했는데 너무 재밌습니다. 오사주님 아니였음 시도조차 못 할 뻔했어요."

“아이구, 기쁜 소식 전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짧은 답장을 보냈지만 나는 안다. 그녀는 이미 준비된 운명의 길 위에 있었고 나는 그저 타이밍에 맞춰 등장한 가이드였을 뿐이다. 때로는 누군가의 한마디가 길을 밝힌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길을 걷기 시작하는 스스로의 용기다.



사주 처방

할까 말까 주저하는 순간, 누군가 나타나 당신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줄지 모릅니다

신을 믿는 이는 신의 은총이라 합니다. 제사 지내는 이는 조상신의 덕이라 부릅니다.

어쩌면 유명한 책의 한 구절처럼 온 우주가 도왔을지도 모릅니다.

무엇이 됐든 가장 중요한 건 한껏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당신입니다. 


이전 07화 그리움을 흘려보내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