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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장 오사주 Oct 25. 2024

시루떡, 돼지머리, 그리고 도깨비

나이: 30대 초반 성별: 여성 직업: 여행 크리에이터

고민: 돼지머리도 꼭 준비해야 하나요?



사주를 보다 보면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분들이 찾아온다. 특히 요즘에는 인플루언서, 크리에이터분들도 상담 신청을 많이 하신신다. 화려한 쪽에서 일하는 분들이라 대부분 긍정적이고 밝다. 그중 여행 크리에이터이면서, 다른 크리에이터들이 편하게 작업할 수 있는 공간 겸 카페를 만들려는 단골 내담자가 있다. 한동안 소식이 뜸했는데 모처럼 상담 신청을 하셨다. 근황이 궁금하던 차에 반갑게 웃으며 대화를 시작했다.

"잘 지내셨어요? 준비하는 카페는 잘 돼가나요?"

그런데 내담자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침울했다.

"선생님, 원하는 매물이 안 나와서 너무 답답해요. 지난달에는 거의 계약이 될 뻔했는데 물 건너가서 진짜 미치겠어요."

"아아구… 허탈했겠네요."


사주를 살펴보니 한여름의 더위가 살짝 꺾여 시원한 바람이 부는 가을의 시작, 처서가 지나면 원하는 매물을 찾고 계약을 한다.

"언제쯤 계약이 될지 알겠어요. 8월 5일이 지나면 소식이 올 거예요. 될 일은 되니 그때까지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고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8월 중순, 그녀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사주님! 정말 8월 6일에 계약이 됐어요!" 

다시금 밝아진 목소리를 들으니 덩달아 신이 났다.

"제가 된다고 했죠? 축하드려요!"


그녀는 개업식에 꼭 와달라는 말과 함께 날짜는 언제로 할지, 식은 어떻게 주관해야 할지 물었다. 택일은 간단하다. 그녀의 사주와 궁합이 맞는 날짜를 고르면 된다. 고민해 봐야 할 건 개업식의 진행 방식이다. 각자가 믿는 신념, 종교관, 예산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 있다.

"대충 머릿속에 그리는 개업식이 있나요? 뭐, 시루떡 같은 것도 하실 생각이세요?"

"시루떡은 요즘 잘 안 먹지 않나요? 그런데 돼지머리도 꼭 해야 해요?"

시루떡은 빠지면 안 된다. 팥은 악한 잡귀를 물리치는 힘이 있다. 하지만 돼지머리는 생략 가능하다. 수 기운 많은 돼지고기는 사연 많은 귀신의 넋을 달래는 굿에 쓰인다. 그러니 도깨비나 터주신에게 잘 보일 개업식에 쓰기에 안성맞춤이긴 하다. 하지만 요즘은 편육이나 보쌈을 배달시키면 그만이다. 이런 설명을 주의 깊게 듣는 내담자를 보니 간절함이 느껴져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었다.

"사실 날짜나 개업식 음식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그게 뭐죠?"


환갑 잔치나 칠순 잔치를 성대하게 하고 갑자기 아픈 어른들이 있는가 하면, 큰 개업식 후 얼마 안 가 폐업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여러 사람을 불러 대접하는 건 의미 있지만 그중에는 시기하는 사람, 질투하는 사람도 섞이기 마련이다. 택일도 중요하고 음식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이런 사람을 거르고, 진심으로 나의 시작을 축하하고 잘되길 바라는 사람을 초대하는 일이다. 시루떡을 놓아 잡귀를 내쫓고 터주신과 도깨비에게 측근을 소개하며 개업식을 하는 건, 한 사람의 시작을 축복하며 신과 인간 그리고 도깨비가 한데 어울려 노는 잔치 벌이기나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개업식에 초대할 사람들을 잘 선별하고 그들을 잘 대접하라는 이야기죠?"

"맞아요. 참! 가장 중요한 걸 빼먹을 뻔했네요. 잔치에 술이 빠질 순 없죠. 느린 마을 막걸리를 준비해 주세요. 빨강, 파랑, 검정 버전이 있는데 꼭 검정 버전으로 준비해 주셔야 해요."

"느린 마을 막걸리 검정… 네, 알겠습니다!"


개업식 날, 각계각층의 크리에이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어쩜 이렇게 잘 꾸몄어" "축하해" "잘 됐으면 좋겠다" 하는 진심 어린 말이 카페 안을 가득 채우니 좋은 기운이 물씬 풍겼다.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을 즈음 내 차례인가 싶어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자, 우리끼리만 이렇게 즐거울 게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곳에 자리 잡고 있었던 터주신 도깨비들에게도 막걸리를 대접해야 하지 않겠어요? 저를 따라 모서리마다 막걸리를 조금씩 따라주세요."

하는 일은 달라도 축복하는 마음은 하나라서인지 막걸리를 바닥에 붓는 사람들의 표정이 한껏 진지해졌다. 그때 내 뒤를 따르던 내담자가 조심스레 다가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귓속말을 해왔다.

"그런데 오사주님, 왜 하필 느린 마을 검정 막걸리인가요? 이게 귀신들이 좋아하는 색깔인가요?"

모두가 숨죽이며 귀를 쫑긋했다.

"사실… 제 최애 막걸리가 느린 마을이에요. 저는 검은색 버전이 제일 맛있더라고요."

순간 모두 어이없다는 듯 큰 소리로 깔깔 웃었다. 창문 너머에서 불어온 바람에 풍경이 흔들렸다. 딩딩딩, 울리는 풍경 소리가 도깨비의 웃음처럼 들려왔다.



사주 처방

개업식에서 택일이나 음식보다 중요한 건 함께하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시작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보다 귀한 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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