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말에 남편의 표정이 굳었다.
이어 들려올 거부의사에 뭐라 답할지, 머리를 굴리던 때였다.
"꼭 거기에 살아야겠어?"
예상과 다른 질문이다.
뭐지? 싶었으나 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은 말없이 내 눈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남편이 뭔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어?
"뭘?"
당황하는 바람에 바보 같은 질문을 하고 말았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한옥은 절대 안 된다던 사람이었다.
이렇게 쉽게 받아들인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설득하려면 꽤나 애먹을 줄 알았는데.
뭐라 대꾸도 못한 채 내가 눈만 껌뻑거리자, 남편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고 보니, 어딘지 모르게 남편은 달라진 것 같았다.
나와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전보다 따뜻해졌다고 할까.
우리가 집을 비운 40일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남편이 마음을 정하자,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서촌에서 우리 집과 비슷한 한옥 공사를 해오던 목수님과 계약 후, 몇 번의 수정 끝에 나온 도면으로 공사를 시작하기로 하고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우리, 괌으로 여행 가자."
운전하던 남편이 불쑥 내뱉은 말이었다.
난 '이 사람이 대체 뭐라는 거야?'라는 표정으로 남편을 쳐다보았다.
"나, 회사 이직하기로 했어. 한 달 뒤에 출근하기로 일정 잡았고."
헐.
퇴사와 이직을 일방적으로 통보받는 것은 늘 그랬던 일이라 오히려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데 여행, 그것도 해외여행을 가자고?
큰 아이가 열두 살이 되도록 회사 일로 바쁘다며 여름휴가도 겨우 갔던 사람이다.
휴가조차 시댁에서 절반을 보낸 뒤에야 남은 시간을 우리에게 할애했던.
그래서 스페인에 못 간다고 했을 때도,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그럴 거라고 예상했으니까.
그런 사람인데.
"당장 공사는 어쩌고 여행을 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내가 물었다.
"철거하는 동안은 우리가 없어도 되잖아. 애들 데리고 다녀오자."
이상했다.
내가 아는 남편이 할 행동이 아니었다.
대학교 3학년, 서로 '이 사람이다'로 시작해 4년 연애 후 친구들 중 가장 빨리 결혼했다.
나 아니면 죽을 것처럼 굴던 남자친구는 결혼과 동시에 어디론가 사라져 더는 만날 수 없었다.
결혼 생활 내내, 나와 아이들에게 더없이 무뚝뚝하고 무심한 남편이었다.
처음엔 섭섭한 마음에 다투기도 했으나, 이제 우리에게 아빠의 빈자리는 익숙해진 상태였다.
"혹시, 우리가 스페인에 간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사람이 생전 안 하던 짓을 하니, 이유를 물어야 했다.
내 말에 잠시 생각하던 남편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열흘 정도는 좋았어."라는 말을 시작으로 그는 담담히 속내를 털어놓았다.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없으니, 자유롭고 홀가분했다고.
그런데, 그 후로는 완전히 달라졌다고 했다.
집안 곳곳에서 환청이 들렸다나?
아이들과 내가 재잘대는 소리가.. 어디를 가든 자신을 따라다녔다고 했다.
".. 너무 보고 싶었어. 너도, 아이들도."
어느 날은, 밥을 먹는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던 남편이 말을 이었다.
"나도, 너랑 애들 데리고 여행 가고 싶어서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