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다 보면 몇 번의 터닝 포인트를 만난다. 그것이 터닝 포인트인지 모른 채 지나칠 때도 있고 터닝 포인트를 알아차리고 바뀐 방향을 따라 속도를 낼 때도 있다. 나에게는 몇 번의 터닝 포인트가 있었던가. 나의 터닝 포인트는 모두 사람과 관계되어 있다.
엄마가 떠났을 때,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리고 글쓰기 코치를 만나 쓰는 삶을 살게 되었을 때. 그중에서 나를 가장 크게 변화시킨 것은 바로 2023년 3월 8일. 내가 마음공부 선생님을 처음 만난 날이다.
긴 봄 방학, 급식 생각이 나서였을까, 그날은 어쩐지 영양 선생님께 전화를 드리고 싶었다. 자전거를 타다 새끼손가락이 부러졌다는 영양 선생님은 손가락 수술을 받고 입원해 계셨다. 선생님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사실은 나도 마음 학교에 가보고 싶다고 말하고 싶어서 한 전화였다. 2년 동안 마음 학교에 따라가자고 하던 영양 선생님의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던 나였다. 그런데 그날은 무슨 이유에서였던지 더는 미루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 통화를 하던 영양 선생님은 마침 다음 학기 수강생을 모집 중이니 등록부터 하라고 하셨다.
3월 8일, 마음 학교 개강일. 영양 선생님은 시작 전에 저녁 한 끼 사 주겠다며 시간 맞춰 약속 장소로 오라고 하셨다. 학교를 마치고 약속 장소 근처 공영주차장에 일찌감치 차를 댔다. 피로가 몰려와 잠시 차 안에서 눈을 붙였다 일어났는데 차 앞으로 낯익은 뒷모습이 지나갔다. 영양 선생님이셨다. 선생님 옆에는 회색 개량한복을 입은 나이 지긋한 노신사분이 함께 계셨다. 영양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스승님 같았다. 얼른 차에서 내려 아는 척을 했다. 쓱 뒤돌아보시는 스승님은 온화한 표정으로 반겨 주셨다. 우리 할머니의 미소를 닮은 것도 같았고 말투도 부드러웠다. 눈썹이 하얗고 머리카락은 하나도 없는, 영락없는 스님 같았다. 회색 옷이 딱 스님처럼 보였다. 손이 참 따뜻하셨다.
스승님은 스님이 아니라 중학교 사회 선생님 출신이라 하셨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처음 생긴 기숙형 공립 대안학교의 교장 선생님으로 초빙받아 태봉고 교장으로 퇴직하셨다고 한다. 공립 대안학교에 초빙받은 교장 선생님이시라니. 그 이력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이곳 진동에 자리를 잡고 마음 학교에서 강의를 이어가고 계신 스승님이 어떤 수업을 진행하실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첫날, 12명이 둥글게 모여 앉아 공부했다. 공부를 시작한 지 10년이 다 되어간다는 선배님부터 이제 갓 2년째 공부하고 있다는 선배님까지. 그중에 신입생은 내가 유일했다. 전현직 교사, 회사원, 커피숍 사장님, 아이를 기르는 주부까지 직업, 배경, 연령이 다양한 사람들이 진주, 양산, 부산, 김해 각지에서 모여 앉아 있었다. 공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마음’. 늘 나와 함께 하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잘 느껴지지도 않는 마음. 그런데 그 마음을 일주일에 한 번, 3시간씩 이야기를 나누고도 아쉬워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날 내가 들은 이야기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나쁜 마음, 좋은 마음이 따로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 마음은 땅과 같아서 원래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인데 꽃, 나무, 잡초도 자라는 것처럼 기쁨, 슬픔, 분노, 원망, 질투 같은 마음이 자라난다고 했다. 이렇게 마음이 자라나게 하는 일을 ‘경계’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나에게 칭찬했다면, 칭찬을 듣기 전에는 이렇다 저렇다 할 마음이 없는 상태였다가 칭찬을 듣는 순간, 그 칭찬이 ‘경계’로 작용해 내 마음에 기쁨이 꽃 피듯 생겨나고, 누군가가 나를 보고 욕을 했다고 한다면, 욕을 듣기 전에는 이렇다 저렇다 할 마음도 없는 상태였다가 욕을 듣는 순간, 그 욕이 ‘경계’로 작용하면서 내 마음에 분노나 억울한 마음이 나무가 자라듯 생겨난다는 것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요란해질 때 그 순간이 바로 ‘경계’인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요란함을 성가시게 여기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경계’를 만나기 전의 아무것도 없이 고요한 마음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마음공부의 핵심이었다.
내 마음이 도통 어떤 상태인지 모르고 덮어두는 경우가 많았다. 교실에서 수업할 때 아이들이 떠들면 내 말을 안 듣고 무시하는 것 같아서 화가 나고 다른 아이들 공부에 방해될 것 같아서, 그리고 떠드는 아이 공부도 제대로 안 될 것 같아서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그 순간 내 마음에 떠오른 화와 걱정을 제때 알아차리지 못하고 괜히 화내 봐야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덮어놓고 진도만 챙긴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바쁜 진도에 떠밀려 화와 걱정을 묻어두고 계속 요란한 상태로 수업을 진행해 나가다가 어느 순간, 아이들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 때를 생각하니 그때의 내가 참 부끄러웠다.
학교에서 업무를 처리하다 내 일이 아닌데도 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는 또 어땠나? 분명 내 일 처리에 쓸 시간도, 집에서 가족들과 보낼 시간도 줄여야만 하니 거절하고 싶은데 그 순간, 나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요구를 수용해 놓고 집에 와서 아까 거절할 걸 후회하고, 상대를 원망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말이다.
뒤늦게 화가 폭발하거나 한참 뒤에 후회하는 것을 막으려면 화가 나는 그 순간 내가 화가 났구나! 거절하고 싶은 그 순간 나는 거절하고 싶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순발력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화나는 마음,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나쁜 것이 아니고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하구나 하고 스스로 마음을 다독여 주면 어느새 마음이 다시 평온하고 고요해진다고 했다. 마음공부는 마음의 작용 원리를 알고 일상생활에서 ‘경계’를 만나면 얼른 내 마음이 어떤지 알아차리는 훈련을 하는 것이었다.
화단에 예쁜 꽃을 키우기 위해 잡초를 뽑는 것인데 잡초에 너무 신경을 쓰다가 꽃이 예쁜 지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 마음이 요란하고 어리석고 글러진다고 표현한다. 화단에 잡초가 나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화나고 원망스럽고 밉고 우울한 것이 당연한 것인데 그 당연한 것을 성가시다고 여기고 그것에만 집중하면 마음이 계속 요란할 수밖에 없다.
혼내는 것은 나쁜 것, 거절하는 것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혼내지 않고 거절하지 않고 살면서 혼자서 화내고 후회한 적이 많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얼마나 앞뒤가 다르고 어리석은 사람이었는지 마음공부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내 마음을 알아차린다고 뭐가 달라질 게 있나? 있고 말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의 마음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첫걸음이고 남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자유로워지는 첫걸음이니 내 마음을 알아차리기 전의 나와 알아차리고 난 후의 나는 이미 레벨이 천지 차이인 것을!
2023년, 3월 8일.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그날이 터닝 포인트인 줄 알고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으니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모른다. 앞으로도 살아가는 매 순간 경계를 알아차리고! 지혜로운 선택을 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샘솟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