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뭐 할 거예요?”
금요일 점심시간, 옆 반 선생님 질문에 그럴듯한 대답을 못 해 볼펜 끝을 책상 위에 딸깍딸깍거리다가
“선생님은 계획 있어요?”
하고 되묻는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시간이 없어서 걱정이라는 그녀의 대답이 유쾌하다. 부럽다.
사실 나의 주말은 단순하다. 아무 계획 없이 푹 쉬며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것이 계획이라면 계획이다. 이번 주만 그런 게 아니라 언제나 그랬다. 엉망이던 집을 누울 자리만큼만 정리하고 텅 비어 있던 냉장고를 채우기 위해 로켓처럼 배송해 준다는 식료품들을 손가락 몇 번 까딱거리며 주문한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아주 가끔 이불 빨래를 하고 그러고도 시간이 조금 더 남으면 뒹굴거리며 책을 읽겠다고, 잠드는 지도 모르게 낮잠을 푹 자고 일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가로로 반듯하게 누워 지낸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들. 그러니까 꼭 하겠다는 게 아니고 할 게 없으면 그거라도 해야 하는 일을 최소로 처리하며 주말을 보낸다. 쉽게 말하면 나의 다이어리에 주말 계획은 불가피한 공식 행사가 아니고서는 없단 말이다.
시간을 마음대로 누릴 선택권이 주어졌는데도 그 선택권을 행사할 생각이 없는 나. 인생 즐길 줄도 모르고 재미라고는 없는 사람.
그래서 옆 반 그녀가 더 부러웠다. 어쩜 저렇게 의욕이 넘치나, 젊어서 피로를 못 느끼나, 타고난 성격일까. 오늘따라 그녀의 대문자 E 성향이, 인스타 맛집에 발 도장을 콩콩 찍고 다니는 역마살이, 홍삼을 먹었을까, 독일제 비타민을 먹었을까, 넘치는 에너지가 참 대단해 보인다.
선택이 힘들다. 자장면 먹을래, 짬뽕 먹을래 물어봐도 그냥 아무거나. 방학엔 뭐 할 거냐고 물어봐도 글쎄. 옷 하나 살 때에도 “이거 주세요.” 말하기까지 오랫동안 고민만 하다 집에 와서야 아까 그거 살 걸 후회하곤 한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보며 신중해서 믿을만하다고도 하고 모난 데 없어 성격이 좋다고도 하지만, 고민하는 데에 긴 시간을 보내고 선택 앞에서 머뭇거리는 나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너무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쓴다고 말하기도 하고 답답하다고 대놓고 면박을 주기도 한다. A형이라 선택 장애가 있어서 그렇다는 말로 대충 웃으며 얼버무려 보지만 사실 그 머뭇거림은 뿌리가 깊다.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것은 까다롭고 예민하지 않은 성격 덕분이 아니라 실상은 무엇 하나 포기하지 못하는 과한 욕심 때문이다. 기회비용을 생각하다 보니 손해 보기 싫고, 선택을 할 때 응당 따라오는 실패를 마주하기 무섭고, 무언가를 선택했을 때 그 결과에 따른 책임을 짊어지기 버거워서 나는 선택하고 실행해야 하는 상황을 피하는 사람이다. 선택을 대신 해 줄 누군가가 있으면 반갑고 늘 그들에게 의견을 묻거나 여론조사를 하고 다닌다. 선택의 순간,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은 결과를 가볍게 받아들이고 싶어서였다. 내 의견이 아니라 누가 이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그랬던 거예요, 책임을 그에게 돌릴 수 있으니 말이다. 결과가 안 좋으면 그사람 때문이고 어쩌다 결과가 좋으면 나도 좋은 거라 여기면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금쪽이들에게서 내 모습을 마주할 때가 많다.
분명 할 말이 있는데도 머뭇거리고 말하지 못하는 S를 보면 어릴 적 내 모습이 보인다. 친구들이 가볍게 말을 주고받는 그 순간에도 S는 이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타이밍을 놓치고 또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연거푸 말할 기회를 잃어버린다. 분명 입을 움찔하며 말할 것 같았는데 말을 다시 삼키고 그저 친구들 이야기만 듣고 있는 S의 마음이 나에게는 다 읽힌다. 이 말을 하면 친구들이 싫어할까? 혹시 날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지나치게 깊이 생각하는 S는 결국 어떤 단어를, 어떤 뉘앙스를, 어떤 표정을 선택할까 고민만 하다가 적절한 시간 안에 선택을 내리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친구들의 요구가 성가신데도 거절하지 못하는 H의 모습도 자주 눈에 밟힌다. 비행기를 접을 거라며 집에서 가져온 색종이를 꺼내놓자 친구들이 우루루 몰려들어 너도나도 한 장씩 달라고 하면 H는 누구한테는 주고 누구한테는 안 줄 수가 없어서 달랑 자기 색종이 한 장만 남기고 친구들에게 색종이를 빼앗기듯 나눠줘 버린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쉰다.
“그렇게 친구들한테 다 나눠 줘 버리면 어떡하니?”
하며 몰래 내가 가진 색종이 몇 장을 손에 쥐어주면 그제야
“줄지 말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애들이 그냥 다 가져가 버리잖아요.”
하면서 억울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싫은데도 차마 거절하는 말을 선택하지 못해 우물쭈물하는 H의 마음이 남의 일 같지 않다.
미술 시간, 도화지에 그림을 그렸다 지웠다 하는 J도 남 일 같지 않다. 무엇을 그릴 지 고민이 깊은 J는 미술 시간의 절반 이상을 고민만 하며 보낸다. 그릴 대상을 정해도 선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다 보니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는 다시 한참이 걸린다. 다른 아이들이 색칠에 전시까지 끝낼 때 쯤 되면 J의 종이 위엔 미완성 스케치만 덜렁 그려져 있다. 책상 위에는 지우개 가루가 한가득, 얼마나 많이 그렸다 지웠다를 반복했는지 도화지에는 구멍이 나기 직전이다. 하루가 다 가기 전에 그림을 완성하면 좋으련만. 그림이 완성되기까지 또 며칠이 걸릴지 모른다. 색깔 선택에도 한참이 걸릴 테니 말이다.
제멋대로 시원하게 말하고, 나쁜 말 섞어가며 쌀쌀맞게 거절도 할 줄 알고, 그림도 아무렇게나 갈겨 그리는 아이들은 자유로워 보이기라도 한다. 그런데 S, H, J같이 자기 검열에 빠져 아무런 선택조차 하지 않는 친구들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지 고민이 깊어진다. S, H, J를 보며 거울 치료를 하곤 한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배우 진서연씨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그녀는 자존감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에 몇 가지를 답했는데 그 중 ‘엄마적 사고’에 대한 설명이 인상 깊었다. 인생을 살면서 많은 선택을 하게 될 텐데 그때마다 내가 나의 엄마라고 생각하고 선택하라고 했다. 내가 나의 엄마라고 생각하면 나를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돌보고 보호하게 되니까 늘 좋은 선택을 하게 될 거라고 말하는 그녀의 말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대단한 결심을 했다. 지금부터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까 고민하며 내리는 선택보다는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한 선택을 매 순간 내리겠다고. 선택의 명확한 기준을 세우고 나니 그 어떤 선택이라도 시원하게 답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솟았다.
내가 아니라 사랑하는 나의 아들, 딸을 돌보는 마음으로 선택을 내려 본다. 오늘은 따뜻한 국을 끓여서 대접받는 느낌으로 아침상을 차리고, 집을 깨끗하게 정리정돈한 다음, 햇살이 따뜻할 때 산책이라도 나가 봐야지. 주말에는 가족들과 가까운 곳에라도 나가 전시회도 보고, 미리 맛집을 검색해 그럴싸한 저녁도 한 끼 하고 기념으로 스티커 사진이라도 한 컷 찍고 와야지. 따뜻한 시선을 건네고 사랑이 담긴 말을 아끼지 말아야지. 잠시 서점에 들러 아들, 딸, 남편이 읽으면 좋을 것 같은 책을 하나씩 사서 선물해 줘야지. 내가 나의 엄마라면 딸의 이런 일상에 잘 살고 있구나, 행복해 보이는구나 흐뭇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도 나의 모든 선택은 나를 위해, 내가 주체적으로 해 나갈 예정이다. 자장면, 짬뽕? ‘아무거나’가 아니라 ‘내 맘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