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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들, 딸에게

by 강혜진

주원아, 주하야,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랑하는 아들, 딸들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에 한 번만, 단 한 번만 귀를 기울여 들어주면 좋겠다. 또 잔소리를 장황하게 늘어놓냐고 투덜대지 말고, 마음을 다해 들어주면 좋겠다.

일 년 전 봄에 나는 무시무시한 꿈을 꾸다 잠에서 깬 적이 있었지. 그날 꿈이 얼마나 생생하던지, 자고 일어나서도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느낌이 가시질 않더라. 꿈속에서 나는 집채만 한 호랑이를 만났다. 호랑이가 나를 물어가려던 그 찰나에 떠오른 것은 우리 아들 주원이와 딸 주하였다.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그 속담이 누군가에게 나쁜 맘 먹지 않고 나쁜 짓 하지 않으며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만은 적용될 것 같았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호랑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어.

“살려주세요. 저는 아직 아들, 딸이 어려요. 제가 엄마 없이 자라봐서 그게 얼마나 서러운지 알거든요. 그래서 아들, 딸에게 그 고통만은 물려주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도 저를 꼭 잡아가야겠다면 딱 1년만 시간을 주세요.”

꿈속에서도 얼마나 간절했던지, 호랑이는 나에게 딱 일 년만 시간을 주겠다며 홀연히 사라졌어.

꿈에서 깬 나는 아빠에게 좋은 꿈을 꿨다고 로또라도 사야 하는 거 아니냐며 신이 나서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단다. 그런데 아빠가 버럭 화를 내더니, 그 꿈이 맞다면 일 년 있다 호랑이가 다시 찾아온다는 말인데 그걸 그렇게 좋아하냐며 엄마를 나무라는 거야.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신 이후로 아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어. 할머니의 장례식이 끝나고 힘들다는 표현도 못 하고 혼자 힘들어 하는 아빠를 엄마는 다 지켜봤거든. 그래서 아빠가 그렇게 불같이 화를 내는 데도 그 마음이 다 이해됐단다. 정신을 차렸더니 갑자기 걱정이 밀려 오더구나. 정말로 나에게 남은 시간이 일 년이라면 나는 무엇을 하며 일 년을 보내야 할까.

버킷리스트에 관해 들어본 적 있니? 아주 예전에는 사형수가 양동이(bucket) 위에 올라가 목에 밧줄을 걸면, 그 양동이를 걷어차서 사형을 집행했다고 해. 버킷리스트란 여기에서 유래된 단어란다. 죽기 전에 반드시 해보고 싶은 것들을 정리한 목록을 버킷리스트라고 하지.

언젠가 엄마도 버킷리스트를 적어 보라는 과제를 받은 적이 있었단다. 그땐,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용기가 없어서 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왕창 적었단다. 세계 여행을 떠나겠다고 썼고 커다란 오토바이를 한 대 사서 폭주족처럼 멋지게 달려보고 싶다고도 썼어. 아무 이유 없이 학교에 가지 않고 땡땡이를 치겠다는 내용도 썼던 것 같아. 그런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땐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고 그저 멋있을 만한 일들, 평소에 해보지 못한 일들을 리스트로 적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호랑이 꿈을 꾼 다음 날, 엄마는 과제를 받은 것도 아닌데 다시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단다. 만약 내가 일 년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다면 나는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만 할까? 그때 제일 먼저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호랑이에게 무릎 꿇고 빌던 그때와 다르지 않았단다. 바로 사랑하는 나의 아들과 딸. 죽음을 생각했을 때 내 우선순위가 명확해 지더구나. 바로 너희 둘.

엄마는 학생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단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자기 자신이라고. 그런데 사람이 살다 보면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인데 바로 그 순간이 부모가 된 순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 말을 꼭 덧붙이지. 너희보다 너희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엄마, 아빠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죽음이 생생하게 다가온다고 생각하니 더 명확해지더라. 내가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내 아들, 딸이라는 것이 말이야. 엄마는 세상 누구보다 너희들을 사랑한단다. 추울 때 따뜻하게 입으라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골고루 챙겨 먹으라고, 공부에 애착을 가지고 열심히 하라고 하는 말들은 모두 다 내가 인생을 살면서 겪었던 시행착오들을 너희들만은 겪게 하고 싶지 않아서 하는 애정이 듬뿍 담긴 말이란다. 그런데 엄마에게 딱 일 년이 남았다면 나는 너희들에게 그런 잔소리 말고 어떤 말을 꼭 해 주어야 할까 깊이 고민해 보았단다. 그리고 한 문장으로 정리했지.

“삶의 모든 순간, 배우는 자세로 살아가거라.”

주원아, 언젠가 새로 만난 담임선생님은 너무 말이 안 통하고 답답하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던 적이 있었는데 기억나니? 그런 담임선생님에게도 분명히 배울 점이 있으니 담임선생님의 장점을 찾아보라고 했던 말도 말이야. 엄마, 아빠가 학교에서 일하는 선생님이라 엄마, 아빠 생각이 떠올랐던지 담임선생님에 대한 너의 푸념이 길어지지 않았던 그해, 나는 네가 담임선생님에게서 무언가 하나는 배우려고 노력한다고 믿고 기다렸단다. 한참이 지나고 난 후에

“엄마, 지나고 보니 그때 우리 선생님, 그렇게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다. 꽤 괜찮은 면도 많으셨고.”

하고 말하는 너를 보며 우리 아들은 캄캄한 밤에도 희미한 불빛을 찾아 계속해서 길을 갈 수 있는 아이구나 하고 느꼈단다.

주하야, 어린이회장 후보로 도전해 보겠다고 했을 때, 엄마는 얼마나 기뻤는지 아니? 실패할까 두려워 도전조차 하지 못했던 나의 어린 시절에 비해 너는 너무나도 용기 있는 딸이라 고마웠단다. 결국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스스로 선거 포스터를 만들고, 아침 일찍 일어나 선거운동을 하고, 엄마 도움 없이도 후보자 연설을 준비하고 연습하던 너를 얼마나 대견하다고 생각했는지 너는 모를 거야. 너에게 실패라는 결과를 뛰어넘을 만큼 멋진 경험이 쌓였다는 걸 너도 알고 있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실패 경험을 백 번, 천 번, 만 번 쌓는 네가 되길 바란다. 성공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과정에서 분명히 값진 배움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늘 죽음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죽음을 떠올리니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게 된 엄마의 경험처럼, 일 분, 일 초, 황금 같은 순간을 소중한 것에 투자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기를.

약속할게. 일 년이 지나서 또 호랑이가 찾아온다면, 그때도 우리 주원이, 주하를 위해 다시 일 년을 더 구걸해 보겠다고 말이야. 엄마는 힘이 닿을 때까지 너희들 곁에서 지혜로운 말을 들려주는 좋은 엄마이고 싶다.

이 책 속에 엄마의 살아온 과거를 담아 놓았단다. 그래야만 하는 줄 알고 살던 엄마가 그러지 않아도 아무 문제 없다는 걸 깨닫는 과정을 담았단다. 설거지 쌓아놓는 게으른, 그러나 행복한 엄마의 소소한 변명을 적은 글이랄까? 잔소리 대신 남겨둔 글을 읽고 당당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너희의 인생을 살거라. 조금 삐뚤어져도 돼. 엄마는 너희의 그 일탈마저도 응원하마.


2025년 10월 24일


사랑하는 엄마 강혜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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