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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원 May 23. 2024

숨그네, 헤르타 뮐러



나는 오늘 배고픔을 느꼈는가?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지 않고 '배고픔'이란 상태에 충분히 허덕여보았는가? '배고픔'이 더 이상 구체적인 식사가 아닌 뼈와 가죽을 위한 지팡이로 지탱해 본 적이 있는가? '배고픔'이 나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던 적이 있는가? 


수용소는 '막사'처럼 사람들을 민첩하게 다룬다. 살아있는 영혼을 대하는 게 아니라 시체가 되어갈, 일련번호를 적재하듯 사용한다. 양철통은 아무리 때려도 피가 나지 않지만 사람은 이빨이 빠지고 절규한다. 같은 수준의 취급을 받는다. 하나의 전리품이 된 인간들. 그에게 중요한 건 '실용성'이다. '죽음'과 '시체'따위는 무심한 단수에 불과하다. 죽은 건 불쌍하지 않다. 나도 곧 저렇게 될 테니까. 연민할 힘으로 삽질을 해야 한다. 


그들에게 죄를 추궁할 수 없다. 이미 지옥이니까. 그들의 시간은 단지 경과할 뿐이다. 그 속에는 공간이나 나, 상호의 개념이 없다. '권태는 불안을 견디는 것이다.' 혹독한 비극은 '두려움'도 인지하지 못하게 한다. '공포'라는 단어는 하나뿐이지만 그들의 '공포'와 나의 '공포'는 수용소와 가정집처럼 다르다. 어느 것도 우월성이 없다. 인간의 영혼을 궁핍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분별력을 흐리며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 어느 곳에 있든지 인간을 범죄 하게 만드는 '어떤 상태'는 비교할 수없이 그 자체, 객관적이고 고유한 상태로도 파멸을 약속한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비극은 매일 있다. 사유가 필요하지 않은 장소에서 배고픔에 질질 끌려다니는 사람들. '수용소로 돌아가는 길을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부르게 될 줄은' 인간이 옷이나 빵 정도가 되는 곳. 사랑이라곤 본능밖에 남지 않았으며 그마저도 배고픔의 껍데기로 폐허가 되는 곳. '사망'이라는 글자는 얼마나 멀쩡한가. '사망'이라는 의미를 표현하지 못한다. 활자를 입고 있으나 사실 아무것도 표현할 수 없다. '사망'은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 없는걸 표현하는 일은 얼마나 부족한가. 헤르타 뮐러의 '낱말 상자'를 엎는다고 해도 나는 그저 뻔뻔한 독자일 뿐이다. 


결코 그들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다르다. 고통의 언어를 정독하고 믿을 뿐이다. 인간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든데 하물며 신의 섭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들의 고통을 내가 해결해 주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에겐 영원한 행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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