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캐는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공부방 선생님’이다. 무역학이 전공인 나는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IMF’라는 직격탄을 맞아 일반회사에 취업하는 대신 그 당시 비교적 취업이 잘 됐던 입시학원 강사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다행히도 적성에 잘 맞았던 나는 결혼을 하고 잔병치레가 잦았던 아들을 초등학교에 적응시킨 뒤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이 된 해부터 집에서 ‘공부방’을 시작했다. 창업비용도 들지 않고 집에서 아이도 돌보며 동시에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직업이었다. 아들이 지금 23살이니 올해로 14년째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어릴 적 내 꿈은 기자가였다. 그래서 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학보사에 들어가 청소부터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활동을 했다. 그러나 선배의 은근한 괴롭힘에 결국 학보사를 나오게 되었다. 작년에 여고 동창이 카카오톡으로 사진을 보내왔다. 내가 학보사 시절 친구에게 보낸 신문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은 것을 찍은 사진이었다. 그리고 친구와 주고받았던 편지에 내가 학보사 그만둔 것을 진심으로 후회한다는 내용이 구구절절 적혀 있다고도 전해 주었다. 그런데 지금 내 부캐는 ‘리포액트’ 시민 기자이다. ‘리포액트’ 대표인 허재현 기자님의 유튜브 방송을 듣게 되다가 얼떨결에 댓글 창을 관리하는 스패너가 되었고 운이 좋게도 시민 기자가 되었다. 2022년 검찰개혁 촛불 집회에 주말마다 혼자 나가게 되었고 페이스북에 사진과 글을 올렸다. 허재현 기자님께서 페이스북을 보고 기사를 써보지 않겠냐고 제의를 하신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리포액트 시민기로 활동하고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니 우울증도 사라지더라.
9년 전 친정아버지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외동딸인 나는 친정엄마를 돌보느라 나 자신은 충분히 슬퍼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친정엄마는 조금 안정이 됐지만 오히려 나는 우울감이 극에 달했던 때였다. ‘시민기자’라는 이름으로 현장 취재를 다니고 각계각층의 인물들 인터뷰를 하면서 정말 바쁘게 지냈다. 수업을 주 4일만 했기 때문에 수업하는 시간을 뺀 나머지 시간인 오전이나 주말에는 취재와 인터뷰를 하러 다녔다. 일주일을 바쁘게 지내다 보니 우울함도 조금씩 사라지고 보람과 긍지도 생기기 시작했다. 나에게 가장 용기가 됐던 말은 “시민 기자라고 기죽지 마시고 당당하게 활동하세요. 시민 기자는 시민들의 대표입니다.”라고 한 허재현 기자님의 말이다. 나는 본캐가 있기에 부캐에서 생기는 활동비는 시민 단체에 후원을 하거나 기부를 한다. 어릴 적 꿈을 이루었다는 생각이 드니 자존감도 높아졌고 우울증도 거의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