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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Jun 05. 2024

오해하지 마세요. 지극히 주관적인 글입니다.

뭣이 중헌디???

남편은 2남 2녀 중 막내

불 같은 사랑을 하고 27살에 결혼을 했다. (불 같은 러브 스토리는 지난 글에서 확인이 가능). 남편은 2남 2녀 중 막내이다. 내가 남편을 결혼 상대로 선택한 이유 중의 두 번째 이유는 남편이 막내이기 때문이다. 우리 아빠는 둘째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제사를 지냈고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시어머니와 효자 아들 사이에서 며느리는 어떤 존재인지 나는 20년 이상 직접  보고 겪었기에 남편이 막내아들이라는 사실이 좋았다. 게다가 그렇게 효자도 아닌 것 같았고... 막내니까 결혼하면 제사에 대한 부담도 없을 것이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할 일은 더더욱이 없을 것이니 더 좋았다. 엄마는 사위가 막내아들이란 점을 너무 맘에 들어했다. 딸이 본인과 같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제사를 지낼 고생은 안 해도 된다고 생각했나 보다.


결혼하고 맞은 첫 명절

9월 2일에 결혼을 하고 첫 추석을 맞았다. 친정에서도 제사를 지내지만 음식은 엄마와 작은 엄마가 만들고 나는 늘 명절에 친구들을 만나 신나게 놀았다. 엄마는 나에게 일을 시키지 않았다. 엄마는 외가가 가난해서 초등학교도 못 다니고 어린 나이부터 식모살이를 하면서 고생을 했다. 그래서 엄마는 결혼해서 딸을 낳으면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시집을 보내리라 다짐했다고 했다. 엄마는 정말 그 다짐을 지켰다. 그런데 시집간 첫 명절에 손님이 30명도 넘게 시댁으로 몰려왔다. 당황스럽고 정신이 없었다. 결혼 전에 남편이 제사 지내러 오는 친척들이 이렇게나 많다고 한 번도 얘기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고 밥을 먹고 돌아간 뒤 밥상은 마치 폭탄을 맞은 듯했다. 그런 밥상을 보니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 졌다. 이게 뭐지? 이 많은 설거지는 어떻게 다 하지? 난 이렇게 많은 설거지를 해 본 적이 없는데... 설거지를 하며 나는 울었다.


1년에 제사가 9번인 시댁

시아버지는 1남 3녀 중 외아들인데 경운기 사고로 병석에 오래 누워 계시다가 남편이 초등학교 6학년 때인 40대 초반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시댁이 있는 동네는 한 집 건너면 다 친척들이다.  친정에서는 명절이라고 해봐야 작은 집 식구들이나 사촌들만 오기 때문에 단출하게 지냈는데 시댁은 하루 종일 친척들과 동네 어른들이 자기 집 마냥 드나든다. 손님이 오시면 일어났다가 가시면 앉았다가 또 다른 손님이 오시면 일어났다가 가시면 앉았다가 종일 그렇게 반복이 된다. 명절에 친척들이 오는 건 이해가 되지만 동네 아주머니들은 왜 명절에 남의 집에 오시는 걸까? 나는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일 년에 몇 번이나 그러냐고 못 됐다고 욕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해가 안 된다.




나 돈 벌러 나가야 하나 봐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 되던 해부터 일을 시작했다. 일을 시작한 것은 시어머니의 영향도 있다.  제사를 마치면 남자들은 밥을 먹고 다들 성묘를 간다. 나는 시어머님과 둘이서 남자들이 먹고 간 밥상에 밥만 새로 퍼와 밥을 먹는다. 나는 그것도 너무 싫다. 왜 여자는 남자들과 겸상을 할 수 없으며 남자들이 밥을 먹을 때 여자들은 시중만 들어야 하고 심지어는  남자들이 먹고 남긴 밥상에서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 지금도 밥을 먹을 때마다 화가 난다. 어느 날 제사를 지내고 시어머니와 밥을 먹는데 시어머니께서 "비 혼자 벌어서 언제 집을 사냐? 너도 돈 벌지 그러니?" 헐, 이건 무슨 소리? 나 돈 벌러 나가라는 소린가? 아들이 어렸을 때 잔병치레가 잦았고 친정도 멀어서 애를 맡기고 일하기가 불가능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외벌이 하는 아들이 안타까워서 그러신 건지 아님 둘이 벌어서 얼른 자리 잡기를 원하셔서 그러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말에 큰 상처를 받았다.


생일상 차리라는 시누이

나는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 되던 해부터 일을 시작했다. 일을 시작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시어머니 생신이 있었다. 시어머니 생신은 평일이었고 마침 그 기간은 시험기간이었다. 큰 시누이가 전화를 했다. "엄마 생일인데 어떻게 할 거야?"  아이들 시험대비 공부를 시켜야 하고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쉰다고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큰 시누이에게 "형님, 제가 평일이라 쉴 수가 없어요. 형님이 어머님 생신 날 미역국 끓여 주시면 저는 주말에 내려가서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나? 큰 형님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그까짓 것도 일이라고 며칠 쉬고 내려오면 되지, 일이 중요해? 엄마 생일이 중요하지?". 평일 시어머니 생일에 못 내려가는 게 이렇게나 욕을 먹을 일인가? 전화를 끊고 나니 서러워서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큰 시누이에게 전화를 다시 걸었다. 몇 번이고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다시 시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형님이 저한테 어쩌고 저쩌고....." 나는 시어머니께서 위로를 해 주실 줄 알았다. 그런데 시어머니께서  "니들일은 니들이 해결해라. 그리고 네가 시집와서 10년 동안 한 일이 뭐가 있니?"라며 전화를 끊으시는 아닌가? 돈을 벌라고 해서 돈을 버는 중인데 일을 하지 말고 생일상이나 차리라니... 어쩌라는 거냐고요. 나는 결혼해서 지금까지 시어머니께 생일 미역국 한 번 얻어먹은 적이 없다. 시누이들이나 시아주버님 생일 일주일 전부터 시어머니는 전화를 하셔서 시누이 생일이니 전화해라. 시아주버니 생일이니 전화해라 매년 전화를 하신다, 시키는 대로 다 전화를 했다. 그러나 내 생일에 전화를 해 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지금까지도.


시댁 행사를 기억에서 지웠다.

나는 일을 하기 전에는 대부분의 시댁 제사와 행사를 챙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일을 하고 있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생기는데 시댁 행사도 잘 챙기고 일도 하라니 말이 안 된다. 나는 그 이후 시댁에 2년 간 가지 않았다. 시댁 경조사와 제삿날을 적은 수첩도 다 찢어 버리고 기억에서도 지웠다. 시댁 식구들 전화번호도 다 삭제시키고 받지 않았다. 나는 그래도 열심히 시댁을 챙겼다고 생각했는데 10년 동안 뭘 했냐는 말을 들으니 어차피 일을 하고 욕을 먹을 바에는 앞으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욕을 먹는 쪽을 택했다. 그래야 덜 억울할 것 같았다. 2년간 남편 혼자 시댁 제사와 경조사에 다녔다.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이 편하고 속이 시원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 내가 왜 바보처럼 얼굴도 못 본 남의 집 조상들 제사상을 차리고 욕을 먹어야 하나 싶어 가지 않았다. 못 되고 독한 년이라고 욕해도 난 정말 괜찮다.


시어머님이 오셨다.

2년간 시댁을 남편 혼자 오르락내리락하니 동네 사람들 보기 민망하셨던지 시어머니가 올라오셨다. 한창 수업 중에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금 시어머니가 우리 집에 오고 계신다는 거다. 예고도 없이 오시는 시어머니가 못마땅했지만 오시는 분을 가라고 할 수도 없고 드디어 2년 만에 시어머니와 마주 앉았다. 시어머니는 나에게 사과를 하러 오셨다고 했다. 시어머니는 내가 큰 시누이와의 갈등 때문에 시댁에 발길을 끊었다고 생각하고 계셨다. 물론 그 이유도 있지만 시어머니 때문이기도 한데 일일이 설명하기도 귀찮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밉던 곱던 며느리에게 먼저 사과를 하시겠다고 인천까지 오신 시어머니 성의를 봐서 사과를 받아들였고 어머님 때문이라는 말은 끝내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그동안 시어머니께 쌓인 불만을 그날 다 얘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이 아니면 다시는 이렇게 마주 앉아 얘기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나는 그간에 서운했던 점을 다 풀어놓았다. 어머니는 그런 기억이 없다고 우기셨다. 하지만 그런 속담이 있다. '때린 사람은 잊어도 맞은 사람은 기억한다". 나는 하나도 잊지 않았다. 나름 곱게 자라 외며느리로 시집가서 막내며느리가 맏며느리 역할까지 해보겠다고 노력하며 살았는데 그 10년을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며느리로 치부당하니 정말 억울하고 분했다. 내가 울면서 하나하나 얘기를 하니 시어머니는 결국 사과를 하셨다. 나는 어머님 사과는 받아들이지만 큰 시누이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시어머니는 그렇게 하라며 본인과는 풀고 살자고 하셨다. 시어머니의 사과는 받아들였지만 아직도 조금의 서운함은 남아 있다. 그 서운함은 아마도 풀리지 않을 듯하다. 큰 시누이가 진심으로 사과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큰 시누이는 지금까지도 지난 그 일에 대해서는 사과는커녕 말조차 꺼내지 않는다.




잘하려고 하지 말자

예전에는 되도록이면 시댁 제사나 경조사를 잘 챙기려고 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가기 싫으면 안 가고 가고 싶으면 간다. 시어머니도 우리 집에 다녀가신 이후로는 내가 제사에 가지 않아도 시어머니 생신을 챙기지 않아도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으신다. 예전에는 제사에 가지 않거나 생신을 챙기지 않으면 전화를 해서 서운해하셨다. 챙기지 못할 때는 마음 한구석이 찝찝하고 죄송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 나도 50살이다. 그동안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를 챙기지 못하면 죄지은 사람처럼 마음이 안 좋아서 눈치를 보고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편하게 살고 싶다. 시어머니 환갑, 칠순도 친척들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했고 식사비며 선물까지 돈도 제일 많이 썼다. 하지만 친정 부모님 환갑과 칠순에는 가족끼리 밥만 먹었다. 그래서 늘 여름휴가는 친정으로 다. 우리 식구 셋이서 휴가를 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정도면 양가에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다. 생일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제사가 뭐가 그리 중요한가? 그런 거 안 챙긴다고 서운한 마음으로 평생을 미워하며 사느니 이제라도 서로 삶의 포인트를 다른 곳에 두고  미워하지 않고 살고 싶다. 그러는 너도 시어머니가 된다고 얘기하겠지만 나는 꼭 그렇게 살려고 노력할 거다.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 아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고 나도 행복해지는 것이다. 서로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도 잘 하려고도 하지 말자. 기본만 하자.


< 작년 내 생일에 셋이 제주도 여행 가는 비행기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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