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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코치 Jun 23. 2024

8. 일상에서의 깨달음

<제2부> 하, 인생이 생각보다 길구나...

'퇴직'이란 짱돌을 맞고 방황한지도 어느덧 두 달여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 자신도 우선은 아무 생각 없이 좀 쉬어야겠다 계획했었고, 

아내 또한 "그동안 우리 가정을 위해 고생 많았어. 당신은 충분히 쉴 수 있는 자격이 있고, 그래서 당분간 마음 편하게 쉬었으면 좋겠어~"라는 응원과 격려를 보내준 터라, 어떻게 보면 '합법적(?) 빈둥거림'을 허락 받고 나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두 달여의 생활을 돌이켜보니, 나의 '기억력'이 가까스로 닿는 먼 어린 시절 이후 처음 겪어보는 생소한 경험투성이였다.


우선, 아침에 눈을 제때 떠야 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가 보통 시간이 정해진 일이 있어야 아침에 눈도 뜨고, 시간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이건 눈을 다시 감아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 날의 연속이라 신기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고를 반복하다가 익숙해져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반대로 밤에 제시간에 가급적 잠자리에 들어야 되는 이유 또한 없었다.


회사나 임원 시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날의 숙제, 내일의 준비물과 함게 책가방을 싸 놓고 항상 잠이 들었던 'ISTJ' 인 내가 밤에 뭘 챙겨 놓거나 미리 생각을 정리할 일이 없어진 것이었다. 거기다 제시간에 굳이 억지로 자려고 할 필요성조차도 없어진 것이고.


'딱히 할 일'은 말할 것도 없고, '딱히 갈 곳'이 없는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하루 종일 아내의 친절한 통제에 따르는 것 외 내가 주도적으로 하는 일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밥 먹자면 군소리 없이 밥 먹고, 산책 가자면 후닥닥 옷 갈아입고 따라나서고, 집이 좀 지저분한데 말 떨어지기 무섭게 청소기 돌려주고...


일부러 먼저 회사 동료나 후배들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정말 정말 이 친구들과는 훈훈하게 마무리해야겠다...'라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일절 전화를 걸거나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하루 종일 '딱히 갈 곳'이 없어진 것이다.

하루 산책 두 번과 가끔 마트 장 보러 따라 나가는 것 이외에는 직사각형의 시멘트 공간 안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던 거다.

아니, 솔직하게는 밥 먹으러 일어났다가는 대부분 침대에서 매트리스와 한 몸이 되어 살았던 거다.


머릿속은 어땠나?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억울함', '혼돈과 희뿌연 불확실함', '무기력함'...

수많은 네거티브 감정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법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온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 하나...

'사람이 위기에 처해도 그대로 죽으라는 법은 없다...'


1월 말에 딸의 승전보가 들려왔다. 

원하던 대학교, 학과에 합격한 것이다.


요즘 학부모들 간에는 대학교 재수를 '징역 1년, 벌금 5천만 원의 중형'이라고들 농담을 한다.

물론 금전적 부담도 있었지만, 나 하나 헤쳐 나가야 할 일이 많을 시간에 딸아이까지 재수를 하고 있으면 집안 분위기가 어떨까? 

부담을 많이 느끼고 있었던 나이기에 딸아이의 합격 소식은 몸에 묶고 있던 무거운 돌덩어리 하나를 풀어 버린 느낌이었다.


"무언가 앞으로 좋은 일들이 생기기 시작할 신호탄일 거야..."

나의 머릿속에 '긍정'의 단어가 이 무렵부터 다시 싹을 튀우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터덜터덜 동네를 산책하던 나에게 주변 사람들이 꼼꼼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도 아마 이 무렵인 것 같다.


여자분들은 연령층이 다양했다.

산책 인구 중에는 중년과 노년의 어른들도 많았지만, 육아로 인해 집에 계신 젊은 여자분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분들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대부분이 백발이 성성한 노년의 어른들이셨고, 어떤 분들은 씩씩하게, 어떤 분들은 조금은 힘겹게 발걸음을 내딛고 계신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문득 돌이킬 수 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지금 이렇게 그냥 시간을 보내며 산다면 저분들처럼 앞으로 이십 년은 족히 이 생활을 해야 할 텐데... 이게 맞는 건가?'


대한민국 통계청 발표 자료에 따르면, 2022년 기준 한국 남성의 평균수명은 81.1세, 여성은 86.7세라고 한다.

보통 돌아가시기 전 사오 년은 몸이 아프다고 가정할 경우, 남성의 경우 대략 75세까지는 활동을 하실 텐데, 나에게는 대략 이십 년의 시간이 남아 있는 것이다.


평생 해 온 것 같이 느껴졌던 직장 생활이 이십팔 년이니까 앞으로 남은 이십 년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긴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겨우 전반전이 끝나 잠깐 휴식시간에 머물고 있는 것이고, 다시 시작할 후반전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깨달음이 머릿속에 콱 박힌 것이다.



'하, 인생이 생각보다 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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