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퇴직'이라는 불청객
일상에서 '눈치를 본다'라는 말은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자신의 생각이나 의사를 감추고 상대방의 의도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것'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고,
다른 하나는, '상대의 뜻이나 주변 상황을 빠르게 살펴 먼저 배려하거나 상대로 하여금 편하게 느끼도록 하는 것' 정도가 될 것 같다.
전자는 다소 부정적인 느낌이다. 당당하지 못하고, 주눅 들어 있거나, 도무지 주도적인 면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할까?
후자는 사회생활에서 인기가 있는 스타일이다. 결론적으로 상대를 기분 좋게, 마음 편하게 해주는 스타일이다.
퇴직 후 집에서 특별한 일이 없이 소위 '뒹굴뒹굴' 거리고 있은 지 한참이 지났다.
아내도 "그동안 긴 세월 가장으로서 고생했는데 일단 푹 쉬도록 해~"라는 따뜻한 격려의 말을 해주었기에
이 '뒹굴뒹굴'도 나름 의미를 부여받은 가치로운 일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집에서 TV를 보면서 이런저런 잡동사니를 접하게 되니 문득 긴장감이 생기게 되는 것 같았다.
은퇴 후 부부 사이가 안 좋아지는 경우가 많고, 그 원인으로 호르몬의 변화에 따른 신체적 이유도 있지만,
아내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주도적으로 운영하던 자신의 생활공간에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다른 사람이 끼어들어 왠지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말 그렇겠구나...'
그래서인지 아내는 이따금씩 나에게 외출 계획이나 일정을 확인하곤 했었다.
그땐 내가 안쓰러워 보여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자신의 생활계획을 세우기 위함이었던 거다.
친구도 만나야 하고, 학부형들과의 교류도 있어야 하고, 무언가 배우러 나가야도 되고...
삼시 세끼 밥 챙겨 주어야 하는 사람이 떡 하니 집에 들어앉아 있으니 본인 일정과 생활리듬을 예전처럼 되돌리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큰일은 아니지만 해야 할 무언가를 찾아보기로 했다.
정말 제한적이긴 하지만 만나야 될 사람들을 찾아 가끔 외출 약속을 잡았고, 미리 알려줬다.
아내도 약속을 잡든, 그날은 밥하지 말고 편하게 있으라고...
그리고 집안에서도 사소한 것들을 찾아보았다.
우선 매일 집 청소를 하는 게 가장 손쉬운 일이었다.
이제 알 것 같았다...
생활가전으로 유명한 싱가포르 브랜드 D사가 몇 년 전에 청소기를 광고할 때,
남자들이 좋아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광고의 의미를...
매주 돌아오는 아파트 재활용 수거의 날은 내가 거의 일등으로 나갔던 것 같다.
관리하시는 아저씨께서 마대와 봉투를 펼치시기 시작하는 시간에 내려가 재활용을 하는 것이다.
한 달이 지났을까?
관리하시는 아저씨와도 어색함이 없어진 사이가 되어 가볍게 대화까지 하는 사이로 발전하였다.
아내와 둘이 밥을 먹은 후에 별일 없으면 아내가 좋아하는 산책을 따라 나갔다.
바쁘게 일하던 시절은 틈만 생기면 집에서는 누워서 쉴 궁리만 했었다.
운동 좀 하라고 잔소리를 들어도 당당하게 " 너무 피곤해~ 쉴래~ " 하고 말았었지만,
이제는 내가 먼저 "산책 갈까?" 하고 강아지 꼬리 흔들 듯 유혹을 했다.
당연히 산책할 때는 손도 꼭 잡아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애들과도 같이 있게 되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이제 철든 나이들이라 아빠에게 가끔 뜬 금 없이 묻곤 했다. "아빠 괜찮아?"...
일을 그만두게 된 아빠가 안쓰러워 보임도 있을 것이고, 하루 종일 빈둥거리고 있으니 걱정돼 보이기도 했을 거다.
요즘 MZ 세대인 아이들과는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 이 딱 적절한 것 같다.
다정함이라는 착각으로 깊은 관심을 보이면 "투머치" 라는 경고의 시그널이 울렸고,
적당히 툭툭 애정을 보여주면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 또한 새로이 터득한 노하우다.
처음에는 주는 밥 먹고, 아내의 눈을 피해 뒹굴뒹굴하는 소극적 '눈치 보기'를 이제 겨우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느낌이다.
배려와 상대방의 마음이 편할 수 있도록 '눈치 빠르게' 행동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