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퇴직'이라는 불청객
어느 날 내 핸드폰에 저장된 전화번호 개수를 세어보니 약 700개 정도가 된다.
평소 연락을 전혀 하지 않는다거나, 다시 볼 일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은 정리를 자주 하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숫자의 연락처가 저장이 되어 있다.
사실 지난 28년간 한 직장을 다니긴 했지만,
부서 이동이나 계열사 이동이 많아 나름 역마살 낀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과장 승진 이후 약 20여 년 정도는 2~3년에 한 번꼴로 부서를 옮기든지 계열사를 옮겨 다녔고,
중간에 중국도 두 번이나 나갔다 왔다.
그러니 해외 거래처까지 포함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관계하며 살았을까?
어림잡아 적어도 2천여 명은 되지 않을까?
정리하고 정리한 것이 7백 명 정도 남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임원이 되고 나서는 평일 점심, 저녁 일정도 모자라 한 겨울과 한 여름을 제외한 연중 8개월 정도는 거의 주말을 골프로 대인관계를 유지하면서 지내왔다.
심하게 일정이 많을 때는 두세 달 연속으로 토요일과 일요일을 모두 골프장에서 보냈고, 골프가 끝나면 어김없이 술 한잔 기울이는 시간이 더해졌었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사람에 치인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두 내 마음 같지 않고, 항상 긴장을 유지해야 하는 관계들이다 보니까 사람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쳐갔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항상 남들 앞에서 이야기할 때도, 무언가 나의 역량이나 커리어를 적는 장면에서도 이런 폭넓은 대인관계를 대단한 자산이자 무기로 이야기하고, 적어내곤 했었다.
하지만 28년의 긴 장정을 끝내고 4개월여 지난 지금,
나에게 예전처럼 함께하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퇴직 발령 이후 연락이 오거나 내가 연락을 취해 만난 사람은 실제 세어보니 대략 스무 명 남짓 정도 되는 것 같다.
정말 나의 퇴직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해 주는 동기나 후배,
반대로 내가 이 사람들과는 인생 1부에서의 마무리 만남은 꼭 가져야 되겠다고 선별한 사람들이다.
내가 연락을 많이 안한 건 퇴직한 선배가 현직 후배들에게 연락하는 것이 괜히 부담을 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내가 현직이었을 때도, 그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연락 오는 퇴직 선배들의 용건은 무언가 부탁하는 건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래서 그 느낌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기억이 뇌리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임원생활 후반기에 같이 근무하는 팀장들과 자주 이야기 한 말이 있다.
사람을 만나는 게 갈수록 힘들고, 어려워서 퇴직하면 내 기준으로 대인관계를 정리하고 싶다고...
택시 미터기를 한 번 꺾고 새로 시작하는 기분으로...
이렇게 말로만 툭툭 던졌던 것이 실제 현실로 마주치니 나의 글재주로는 표현이 안되는 복잡한 감정들의 응어리가 느껴지는 것 같다.
지난 1월 말, 퇴직 임원들이 나가는 사무실에서 자리를 만들어 준 교육시간에 나와 같이 대기업을 퇴직하고 유튜브, 강의, 저술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 나가고 계신 분의 강의를 들었는데, 그 분도 퇴직 후 해야 할 세 가지 일 중에 하나가 지난 (사회적) 인간관계를 과감히 정리하라는 것이었다.
좋은 기억은 좋은 기억으로 남겨두기 위해, 나의 착각으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 과감하게 정리하라는 것이었다.
옛말에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했던가?
한때 나 스스로를 삼천궁녀 거느리고 살던 의자왕처럼 의기양양 착각하고 살았던 기억에서 빨리 빠져나와
인생 허무함의 진리를 곱씹으며 쓴 소주 한잔 털어 넣으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