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어느 날 갑자기 찾아 온 '퇴직'이라는 불청객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하루 8시간 근로가 의무이지만 실제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아침에는 러시아워 출근이 주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집을 일찍 나서기도 하고,
저녁에는 야근이다, 회식이다, 아니 별다른 일정이 없는 날도 퇴근시간 러시아워가 두려워 느지막이 퇴근을 하는 경우도 흔한 일이다.
낮 일과시간은 어떠한가?
여기저기 회의에 불려 다니고, 팀장이나 임원 호출에 수시로 불려 다니고 하다 보면 진득하게 PC 앞에서 보고서 몇 자 적어보려면 벌써 오후 늦은 시간이 되기 십상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요즘 MZ 세대처럼 딱히 일과 후 자기 계발에 투자할 줄도 모르고 살아온 아날로그 세대라 야근을 밥 먹듯이 했던 것 같다.
임원이 돼서는 겉으로 보면 비슷하지만, 내용 측면에서는 한층 더 힘들어졌다.
이때는 누가 시켜서, 누구 눈치 보느라 야근을 하지 않는다.
맡고 있는 일이 일단 어렵다.
날로 경쟁 환경이 복잡해져 가고, 변화의 속도가 빨라져 가고만 있기 때문에
옛날 경험했던 알량한 경험적 지식으로는 일을 처리해 내기는커녕 문제를 제대로 따라가지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어, 2016년 세계경제포럼(WEF, World Economic Forum)에서 회장인 클라우드 슈밥(Klaus Schwab)이 '4차 산업혁명'을 처음 주창한 이래 빅데이터,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등 미래기술이 내 일에 '새로운 일상'으로 빠르게 자리 잡을 줄 꿈이나 꿨겠는가?
결국, 공부 안 하면 못 따라간다는 것이다.
또, 임원은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이다.
가정에서 사소한 의사결정을 할 때도 부부간에, 자녀들과 의논을 통해 신중하게 하는데,
회사에서 금전적으로 바로 영향을 주고, 단기적인 회사의 성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의사결정이 쉬운 일이겠는가?
이 또한 죽으라고 공부하고, 고민하지 않으면 대단히 위험하고 무책임한 행동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하루 종일 회의와 면담이 많음은 물론이고, 이를 준비하고 룩백하는데도 만만치 않은 시간을 쏟아야 하니 "새벽 별 보고 나와서 저녁 별 보고 집에 들어간다. "라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가 막힐 일이 발생한 것이다.
단지 회사의 퇴직 발령 한 줄이 나의 일상을 단 하루 만에 180도 바꿔놓은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떠야 할 목적이 없어진 것이다.
밤에 잠들 때도, 일정 시간 잠을 자야 하는 신체적 리듬 문제 외에는 굳이 그 시간에 잠을 청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 거다.
최소한 초등학교 시절에도 내일의 등교를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라는 문구도 있었지만...
기억도 흐릿한 철들기 전 시절 이후 사십여 년 지켜 온 '제시간에 자고, 제시간에 일어나기'가 작동하지 않는 새로운 세상에 들어선 것이다.
아침은 더 가관이었다.
임원 생활을 할 때 몸이 어지간히 좋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면 새벽 다섯 시 반이면 눈을 떴었다.
그러다 보니 새벽 이 시간이면 자동으로 눈을 뜨긴 했지만, 일어나야 하고, 씻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였고,
괜히 시끄럽게 하다가 아내의 아침잠을 설치게 하면 미안함만이 남는 손해 보는 장사라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러고는 허리가 아파서, 아내가 늦은 아점을 먹자고 깨워서 해가 중천에 뜬 시간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사용하는 침대는 중년의 부부가 많이들 그러하듯,
서로 편한 잠과 워낙 일찍 일어나야 하는 나 때문에 오랫동안 따로 자다가
이 생활이 너무 길면 좋지 않겠다고 아내와 의논 끝에 고가의 'King Size'를 구매한 것이었다.
178센티와 172센티 두 장정이 같이 잠을 자도 양쪽에 공간이 남을 정도의 크기인 데다가, 매트리스 퀄리티도 엄청 좋은 것으로 산 것이다.
그런데도 얼마나 잤으면 매일 허리가 아파 더 못 자고 일어난 것이다.
이후 늦은 아점을 먹고, 밥 값은 해야 하니 간단한 청소를 끝마치면 하루치 미션이 클리어 돼버렸다.
쉽게 말해 딱히 할 일이 없어진 거다.
하루 종일 핸드폰도 광고성 문자 외에는 미동도 없다. 누구도 연락 오는 데가 없었다.
어영부영 금방 해가 지고, 밥 먹고...
또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해야 하는 시간이 금방 올 텐데... 매일 걱정이었다.
철들고 내가 가져본 모든 것 중에 차고 넘칠 정도로 가장 많은 것이 지금의 '시간'이었다.
이 많은 시간을 어찌하면 좋을까?
더군다나 난 자기만의 루틴이 깨어지면 스트레스를 엄청 받는다는 'ISTJ'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