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I. 캐나다_4.윌로우 트리

by 에리스


미카엘이 돌아오던 날,

우리는 그가 떠나기 전 함께 걸었던

공원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불을 켜지 않으면 칠흑처럼 어두워지는

지하방을 나와 쪽문을 열고 올라오면,

내가 살고 있는 동화 속 그림 같은 핑크색 집.

그러나 어딘가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그 집에 살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나곤 했다.


집 앞의 길을 건너면 바로 공원이 보였다.

이 집으로 이사를 오고

미카엘이 떠난 뒤로 거의 매일 비가 내렸다.

밴쿠버에서 매일 오던 비가

한 번씩 그칠 때면

하늘의 모든 구름이 사라진 것처럼

해가 쏟아져 내렸는데

그날은 그런 날이었다.


건너편 나무에

기대 서 있는 그가 보였지만

나는 어색해서 못 본 척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신호가 바뀌고, 그에게 가까워질수록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표정,

40살과 7살이 섞인 그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우리는 가볍게 포옹을 하고

밴쿠버에서 제일 큰 공원으로 향했다.

다시 핑크색 집을 지나,

처음 이야기를 나눴던 길을 걸었다.


역에 가까워질 때쯤

그가 작은 상자를 하나 내밀었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초콜릿이 있었는데

핑크색 설탕이 씌워진 하트모양 초콜릿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이게 벨기에 초콜릿이냐며

어색함을 감추며 고맙다고 했다.


그렇게 몇 걸음 걸었을까

그의 웃음소리와 함께 차가운

어떤 것이 발목에 튀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웅덩이를 세게 밟으면서

내 옅은색 청바지 아래쪽이 흙탕물로 뒤덮인 것이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그냥 가도 된다고 했지만,

그는 내가 바지를 갈아입고 나오길 바랐다.


나는 그가 옷에 관심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최대한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나왔다.

그래도 캐나다에 가져온 몇 안 되는 옷 중에서

가장 핏이 좋은 청바지를 입고 나왔다는 건

그는 몰랐을 것이다.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가

오늘 별로 입고 싶지 않았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바지를 버린 것보다

어쩐지 마음 깊은 곳이 더 불편했다.


우리는 공원의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은 나무들 사이로

하루 종일 걸어 다녔다.

나는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날 신었던 하얀색 운동화가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걷다가 버스를 타고 그가 좋아한다는

타이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는 자신의 맥주를 시키면서 나에게 묻지도 않고

“For her.” 하고 말해 내 것까지 함께 주문했다.

나를 위해 시킨 맥주는 호가든이었는데,

그는 벨기에 맥주라고 설명하며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말수가 많지 않은 그가 관심 있는

이야기를 할 때는 말이 길고 빨라졌다.

그의 나라는 초콜릿에서 호가든의 나라가 되었다.


사실 나는 그가 돌아왔고 만나자고 했을 때

이렇게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이야기 나누는 장면을

상상하고 있었다.

다만 그런 시간들이

우리의 하루에 자연스럽게 놓일 수 있을지는

확신이 없었다. 그런 시간은 그때의 우리에게

너무 멀리 있는 장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사는 곳에서 15분쯤 거리에

친구 집에 잠시 머물고 있었다.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줬고

다시 내 방에서 영화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도 그와 같이 있고 싶었지만

내 지하방으로 같이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플렛메이트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우리의 첫 데이트를

그 방에서 마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아쉬운 얼굴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던 그는 한 시간쯤 뒤에

다시 집 앞 공원으로 산책을 하러 왔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우리는 다시 공원 꼭대기에서 만나기로 했다.


도착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바위 위에 앉아서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은 그의 표정처럼

어린 소년 같기도 하고 생각이 많은

노인의 모습 같기도 했다.


나는 한국 계좌에서 캐나다 계좌로

송금을 하는데 문제가 생겨

은행과 통화연결을 하고 있었고

그는 바위에 누워서 조금씩 내리는 비를 맞으며

얼굴까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나는 왼쪽 귀에 휴대폰을 대고

대기 음악을 들으며

오른쪽 귀를 그의 누워 있는 가슴팍에 댔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의 심장 소리가

은행 대기 음악보다 크게 들려왔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는 그의 후드를 걷어

그에게 입을 맞췄다.

비는 거세지기 시작했고

우리는 바위옆에 있던 나무아래로

들어가 비를 피했다.

머리카락처럼 잎을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윌로우 나무 아래서 우리는 다시 입을 맞췄다.


우리는 그 지하방으로도,

그의 친구 집으로도, 벨기에도, 한국에도

어디로도 갈 수 없었지만 나무의 긴 줄기 아래에서,

잠시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 인생은 어디로 흐르는지도

모르면서 그를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건.


나는 그와 함께 있을 때 내내,

그 순간처럼 어디로도 함께 갈 수 없고 불안했지만

그렇게라도 같이 있고 싶었던 것 같다.

화,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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