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나의 평행세계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적은 처음이었다.
곧 우리가 만남을 시작한 지 1000일이 되는 날이었다. 분명 그전에는 연락이 올 거라 믿고 기다렸는데, 기념일 코앞인 전날 저녁이 되도록 아무 연락이 없었다.
싸운 지 2주가 흘러있었고, 14일 동안 우리는 서로의 일상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 이번엔 내가 손을 내밀 순서 인가보다.
퇴근 후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아직도 일하느라 바쁜 건가 싶어 카톡을 남겼다.
내일이 우리 1000일이야. 같이 저녁 먹고 싶은데... 어때?
한참이 지나 전화가 걸려왔다.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지 고작 그깟 전화벨에 심장이 뛰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대해야지. 싸움이 있기 전날 그랬던 것처럼.
애써 명랑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는데,
그의 목소리 온도는 나와 정반대였다. 그리곤 꼭 한 번에 알아들으라는 듯이 또박또박하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과 이렇게 싸울 때마다 지쳐간다. 당신이 하는 일들에 내가 너무 간섭하는 것 같다. 그건 당신에게도 안 좋고 나도 힘든 것 같다. 우리 이제 그만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순간 멍해졌다.
분명 내일 몇 시에 회사로 데리러 갈까? 뭘 먹을까?라는 대화를 나누고 있어야 하는데 이게 무슨 말인가.
그는 지금껏 한 번도 나에게 그런 비슷한 말 조차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난 우리의 헤어짐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너무 당황스럽다고 했지만 그는 이미 결심이 굳은 듯 보였다. 그리고는.. 미안해..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뭘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고, 믿기 싫은 현실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고, 내 잘못이 그 정도로 어마어마했던 건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이럴 순 없었다.
잠옷에 겉옷 하나만 걸쳐 입고 집을 뛰어나와 택시를 불렀다. 그의 집에서 우리 집은 차로 15분 거리였는데 그날은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의 집 문 앞에 도착해서 황급히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란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보고 서있었다.
나는 울면서 그에게 걸어갔다.
그 순간이 마치 영화 속 절대 잊지 못할 한 장면처럼 뇌리에 박혀서 아직까지도 가끔 괴롭힐 때가 있다.
나를 바라보고 있던 그의 표정 때문이다.
그는 지금껏 내가 알고 있던 남자가 아니었다.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나에게 아무 감정이 없는 눈동자를 하고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일 들락날락 대던 이 집에 갑자기 왜 찾아왔느냐는 듯한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나는 헤어지지 못하겠다며 울었다.
온몸을 떨며 어깨를 들썩이고 우는 나를 가만히 보다가 그는 날 안아주기는커녕 내 양팔을 붙잡았다. 이러지 말고 일단 집으로 가라고만 했다.
돌아가라는 말에 나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가 다 잘못했으니 이러지 말라고. 앞으로 잘하겠다고 빌며 울었다.
몇십 분이었는지 몇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잠시 울음이 멈추었을 때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그의 휴대폰이 쉬지 않고 연신 진동이 울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전화진동은 아니었고, 끊임없이 카톡이나 문자가 도착하는 불규칙하고 짧은 진동음이었다. 지금껏 내 울음소리에 묻혀 모르고 있었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순간 그도 내가 눈치챈 걸 알고 잽싸게 휴대폰을 집어 그의 바지 주머니 속으로 넣었지만 얄궂게도 그 주머니 속에서도 진동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왜 그의 눈빛이 낯설었고, 이렇게 처절하게 무릎까지 꿇어가면서 오열하고 있는 나를 한 번도 달래주지 않는 걸까 들었던 의문의 답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벌떡 일어났다.
카톡이 계속 오는 것 같은데, 여자냐고 물었다.
내가 한심하기라도 하다는 듯 콧방귀를 한번 뀌더니 아니라고 했지만, 그는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라 말투와 표정에서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차라리 누구인지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했다. 그 순간부터 눈물은 더 이상 나지 않았다.
3년을 매일 봐왔던 얼굴에서 이미 YES 이상의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래도 확실한 대답이 필요했다. 그래야 했다.
더 이상 옥신각신 하기 싫었던 것인지 나 때문에 카톡에 답장을 못해주고 있는 그녀를 더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서인지 그는 깊은 한숨을 쉬더니 결국 사실을 인정했다.
고작 14일 사이에 내 자리에 다른 여자가 들어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