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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Y Sep 02. 2024

내 첫사랑은 군복 입은 남자였다

나는 지금의 직업을 갖기 전까지 극히 소심한 성격이었다.

초등학교 내내 반장을 하면서도 앞에 나서거나 발표하기가 두려워 떨렸고, 선생님이 조금만 곤란한 질문을 하면 바로 얼굴이 홍당무가 되기 일쑤였다.

어디 가서 모르는 사람에게 말 한마디 건다는 건 고통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내가 재미도 없고 말수도 없는 이 군인 오빠와 조그마한 술집에 단둘이 마주 앉게 되었다.


역시나 한동안 둘 다 말없이 가만히 술잔만 내려다봤다.

4인방 없이 나 혼자 남자랑 이런 자리에 있다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 자리에 오기 전 S양에게 수도 없이 전화를 걸어 혼자는 죽어도 못 만나니 제발 와달라고 법석을 떨었지만 그녀의 거절로 나는 홀로 이 두려움 앞에 섰다.

S양 말대로 그냥 다음에 보자며 거절하면 되는 건데 왠지 그 말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겪고 있는 고통이었다.


오빠는 부대로 복귀하기 전 꼭 나를 다시 한번 만나보고 가고 싶어서 용기를 냈다는 말로 운을 뗐다.

심지어 복귀는 바로 다음날이었고, 부대위치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지방의 작은 도시였다.

아침 비행기를 타고 가서 공항에서 또다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은 더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다시 휴가를 나오는 건 몇 달 뒤가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아쉽게 느껴졌다. 또 여기에 올 수 있는 날이 한참 뒤라니..

오빠는 소중한 휴가의 마지막날을 내성적인 나와 어색하게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애처로웠던 건 며칠 전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이 헤어진 전 여자친구의 생일날이라는 것이었다. 일부러 그날에 맞춰 휴가를 나온 거였는데, 변심한 전 여자친구가 끝까지 만나주지 않아 친구와 함께 늦은 시간까지 기다리다가 결국 포기하고 집에 돌아가려는 길이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이상한 연민이 끓어올랐다.

누군가는 그 얘기를 듣고 찌질한 남자라고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그 진실된 얼굴과 말투에서 얼마나 그녀를 좋아했고, 그 마음에 진심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또 굳이 내게 하지 않아도 되는 얘기들을 털어놓음으로써 혼자 놓지 못하고 있던 그녀에 대한 감정을 나에게 이해받고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제대로 고백을 하거나 앞으로 잘 만나보자는 말을 꺼낸 것도 아니었다. 이제 오늘로써 전 여자친구에 대한 마음을 접겠다는 오빠의 말에서 나 홀로 진정성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오히려 둘이 있으니 오빠는 편안하게 대화를 잘 이끌어갔다.

시간이 조금씩 지날수록 어색함 따위는 없었다.


서로 자라온 환경, 현재에 머무르게 된 계기, 앞으로의 계획까지 우리는 처음 만난 사이 치고는 꽤 많은 정보들로 서로를 알아갔다.

그만큼 술병의 개수도 점점 늘어갔다.






후다닥 하는 기척에 놀라서 잠이 깼다.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인지 바로 정신이 들지 않았다.


내가 잠이 든 건가? 조금 전까지 나는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집이 아닌 건가? 옆에 누가 있는 것 같은데.


여기가 어디고 지금이 언제이고 인지할 새도 없이 내 옆에서 누군가가 급하게 옷을 입으며 요란을 떨었다.

낯선 곳에서 눈을 뜬 나는 옆사람의 행동에 맞추어 빠르게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비행기를 놓친 듯했다.

오빠는 어머니와 항공사에 번갈아 전화를 걸어 다음 비행기 시간을 체크하며 다급해했고, 나는 어쩔 줄 몰라하며 언제라도 나갈 채비를 마친 채 문 앞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내 예약이 잘 된 건지 여러 번의 통화를 마친 오빠는 빨리 택시를 타야겠다고 했고, 나보고 같이 가줄 수 있겠느냐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택시는 먼저 오빠의 집을 들렀고 내가 차 안에서 기다리는 동안 오빠는 급히 군복을 갈아입고 나왔다.


처음 본 오빠의 군복 차림을 보고 심장에 벼락이 꽂혔다.

뭐야 이 남자.


내가 본 어떤 군인도 이렇게까지 멋있지 않았다.

몸이 다부지게 보인다고 생각은 했지만, 군복을 입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어제는 못 느꼈던 설렘이 군복 하나에 급격히 오고 있었다.

친구들이 휴가 나오는 날 입고 있는 것과 뭔가 달라 보였다.

어제까지 평범하게 보이던 사람이 신데렐라도 아니고 군복을 입자 기막힌 반전의 모습으로 변했다.


늦었다는 조바심 때문인지 오빠는 택시 안에서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더더욱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말없이 내손을 꼭 잡고는 있었지만, 나는 이 단계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 그냥 내 손을 맡긴 채 고개를 돌려 빠르게 지나가는 바깥 풍경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두근대는 내 심장 소리가 밖으로 들리지 않는 게 다행스러웠다.


오빠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내 손을 꽉 잡고는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고 그렇게 출발게이트까지 한숨에 달렸다.

게이트 입구에 다다르자 오빠는 갑자기 내 입술에 빠르게 입을 맞추고는 "전화할게"라는 말만 남긴 채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이게 뭐지?

마음이 이상했다.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이게 무슨 감정인건지 알 수가 없었다.


시작이 오자마자 끝이 동시에 와버린 것 같았고, 오늘부터 나에게서 멀리 가버리는 저 오빠의 뒷모습 만을 기억하게 될 것 같았다.

하루밤새 내 순정을 빼앗고 다음날 재빨리 도망가는 양심 없는 남자의 모습이 이러려나.

돌아올 때까지 간직하라는 사랑의 징표 같은 것을 남긴 것도 없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그 애정과 존중의 끄트머리에서 사랑을 나눈 것도 아니고, 아무 감정도 없이 술김에 하룻밤을 저 도망가는 남자에게 선사해 버린 내가 너무 수치스러웠다.


그렇게 혼자 공항을 나와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다.

내 자신에 대한 환멸과 복잡한 감정에 결국 눈물이 흘렀다.


어젯밤부터 내 일거수일투족을 끊임없이 궁금해하고 있을 S양에게 털어놔야 했다. 중간에 내려 그녀의 집 앞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슬리퍼 바람으로 나와 궁금한 표정을 짓는 S양에게 나라 잃은 표정을 하며 어제의 일을 고백했다.

그리곤 군복 입은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반했다는 말을 하며 슬쩍 웃음을 보였다.


"미친년....."


 S양이 쓴소리를 시작하기 시작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부대 앞에 있는 공중전화라며 잘 도착했다는 오빠의 전화였다.

급하게 와서 너무 미안하고 전화가 어려워 편지를 쓰고 싶으니 집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웃었고, 또 심장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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