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2년간의 대학 생활은 학교 가서 연애편지 쓰는 일이 다였다.
수업시간에 몰래 편지를 쓰다가 제일 무서운 교수님한테 걸려서 크게 혼난 적도 있었지만 난 편지 쓰는 일을 하루도 멈출 수가 없었다.
동시에 우리 집 아파트 우편함에도 매일 알록달록한 편지봉투가 하나씩 배달되어 왔다.
우체국 아저씨가 다녀갔을 시간이 되었다 싶거나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우편함으로 달려갔다.
주말엔 편지를 받을 수 없어 안달이 났고, 대신 이틀만 참으면 2,3개가 한꺼번에 도착하니 월요일이 제일 좋았다. 그날 도착한 편지는 꼭 가방에 넣고 나가서 버스 안이나, 수업 중이나 시간만 있으면 꺼내어 읽고 또 읽었고 하루에도 열 번이 넘게 접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보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져갔다.
우리는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도 글로 했다.
편지로 첫 면회를 와달라고 했을 때, 거의 한 달이나 남은 면회일을 앞두고 설레어 잠도 못 자고 거의 물만 먹으며 다이어트를 했다.
면회객들 사이에 제일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동대문을 4시간 돌아다닌 끝에 고른 하얀색 원피스를 입었다.
비행기를 타고 또다시 택시를 한 시간이나 타고 도착한 그 낯선 곳에서 내 인적사항을 적고 오빠를 기다렸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데.. 다 똑같은 군복을 입은 저 비슷비슷한 남자들 사이에서 오빠가 누군지 못 알아보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었다.
한참 기다린 끝에 면회실로 들어오는 오빠를 나는 한눈에 알아봤다.
두 달 반 만에 만나는 두 번째 만남이었다.
오빠는 특수부대인 특전사에 하사로 입대해서 중사로 전역했다.
총 복무기간은 4년이 넘었었는데, 나와 하사계급일 때 사귀었으니 연애 초반엔 만날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았지만 중사로 진급을 하고 나서는 주말부부처럼 거의 매 주말을 함께할 수 있었다.
나는 군복을 입고 베레모를 쓴 오빠의 남자다운 멋진 모습이 자랑스러웠고 뭘 물어보든 척척 대답을 해주는 그를 존경했다.
오빠는 부대 안에서 짬이 나면 운동과 독서를 주로 했고, 쉬는 날은 어김없이 나와 시간을 보냈다.
당당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반면에 나를 대할 땐 언제나 어른스러웠고 세심하고 부드러웠다.
날리는 나뭇잎 하나도 날 건드리고 지나가지 못할 정도로 나를 감싸고 아끼고 사랑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전역날까지 며칠이 남았는지 세고 하루를 시작했다.
사회에 나오게 되면 어떤 모습일까?
군복이 아닌 양복을 입을 오빠를 상상하며 흐뭇해했다.
남자답고 멋있는 군인 남자친구가 생긴 뒤로 4인방의 놀이 같던 '헌팅'은 나와 멀어졌다.
가끔 누군가 대시를 해와도 늘 도도하게 군인 남자친구가 있음을 밝히면서 특전사라는 코멘트를 항상 갖다 붙였다.
특전사 얘기를 꺼내면 한 대 얻어맞은 강아지 얼굴을 하고 물러나는 남자들을 보며 은근히 즐겼었다.
그런데 나와 데이트 기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리 부사관 월급이라 해도 주말이면 먹고, 자는 데에 비용이 은근히 많이 들었다.
점점 돈이 부족하기 시작했다. 뻔한 군인 월급으로 빠듯한 게 당연했다.
오빠는 신용카드를 하나씩 늘려갔다. 그러다 조금씩 대출도 받았고 나중에는 내 카드까지 합세해서 카드 돌려 막기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나는 나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카드값을 같이 메꿔갔다.
마침내 그렇게 오래도록 고대하던 전역날이 왔을 때,
오빠는 빚만 안은 채로 부대를 나오게 되었다.
난 카드결제일이 다가오는 공포를 이십 때 초반부터 경험했다.
부모님한테 말도 못 꺼내고 끙끙 앓아가면서 죽어라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이상하게도 그 듬직하고 책임감 강하고 몸과 마음이 누구보다 건강했던 오빠는 제대 후에 꼼짝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돈이 없다고 나는 만나지 않으면서 전화를 해보면 밤새도록 친구들과 PC방에 있었다고 하는 날이 많았고, 아침에 귀가해서 저녁까지 잠을 잤다.
그리고 점점 연락이 닿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제대한 지 몇 달이 지나도 아무 일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동네 친구들과 매일 어울리며 겨우 전화만 받을 뿐, 제대하면 매일 볼 수 있겠구나 했던 기대는 서운함이 된 지 오래였다.
너무 오래 군대에 있었으니까.
그저 사회에 적응해 가기 위한 과정 일거라고 생각했다.
일주일을 넘게 만나주지 않다가 12월 19일이 우리의 1000일이라고 문자를 보냈더니 그제야 마지못해 친구들을 불러서 조촐한 1000일 기념 파티를 했고, 그다음 날부터는 제대로 행방불명이 되었다.
하도 연락이 안 되던 어떤 날은 아르바이트가 끝나자마자 오빠의 집 앞에 찾아가서 밤새 기다렸는데 결국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나는 발끝이 꽁꽁 언 채 집으로 돌아가 앓아누웠다. 크리스마스에도 미리 주문했던 케잌을 혼자 먹으며 보냈다.
불안한 예감이 낯설지가 않았다.
불과 2년 전쯤 나는 새아빠의 망나니짓을 눈치챈 이력이 있다.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통화내용을 들은 적도 없고, 의심되는 번호를 포착한 것도 아니지만 내 촉이 반응하고 있었다.
오빠의 손에는 내 카드가 쥐어있었다.
언젠가 잘 갚아가고 있는 내 카드를 잠시 달라더니 돌려주지 않았고 난 그것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제야 그 카드가 생각이 났고 혹시나 싶어 카드 내역과 사용처를 확인하고는 심장이 내려앉았다.
내 전화를 안 받은 날마다 오빠는 어떤 특정 지역에 가 있었다. 그 지역에서 내 카드를 써댔고, 그동안 PC방, 술집, 그 외 뭔지 알 수도 없는 곳에서 결제가 되었는데 모두 오빠의 집에서 한 시간 이상 거리인 동네였다.
내가 알기론 오빠는 그 동네에 아는 지인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 내역의 끝에는 "OO모텔"이 있었다. 바로 그저께였다.
오빠의 친구 멸치 트레이닝에게 전화를 걸어 그날 같이 있었는지 묻자 역시나 아니라는 대답을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우리 오빠에게 다른 여자가 있는지.
그 수다쟁이가 갑자기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곤 당근이라도 하나 던져 주듯 "직접 듣는 게 낫겠다. 지금은 집에 있을 거야"라는 말을 했다.
냅다 달려 나가 오빠의 집으로 향하면서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초인종을 열 번 넘게 누르고 현관문을 쾅쾅 두드렸다.
한참 소동을 피우자 안에서 더는 못 견디겠다는 듯 잠갔던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먼저 문을 확 잡아채서 열어젖히자, 그렇게 보고 싶었던 오빠가 서있었다.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나에게 아무 감정이 없는 눈동자를 하고선
주말마다 나를 데려왔던 이 집에 갑자기 왜 찾아왔느냐는 듯한 얼굴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