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문
결혼 전 친구들과 남편이 함께 한 술자리가 있었다. 친구 중 한 명이 아는 오빠를 동석시켜도 되는지 물어봤고, 예비 아내 친구들에게 점수를 따고 싶었는지 남편은 흔쾌히 승낙했다.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을 때, 나는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느라 ‘퍽’하는 소리가 날 때까지 무슨 상황인지 몰랐었다. 남편은 처음 본 그 남자를 뒤로 나자빠질 때까지 때렸다. 이유는 단순히 그 남자의 ‘말 한마디에 기분이 상해서’였다.
친구들은 기겁했고, 그것이 내 친구들과 남편의 처음이자 마지막 술자리였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때 이미 '신(GOD)'은 나에게 시그널을 주었다.
'네가 결혼해야 할 남자가 이런 놈이다. 어쩔래?'
신이 갈림길 앞에서 이정표를 꽂으며 친절하게 직접 눈으로 확인까지 시켜줬지만, 어리고 무지했던 나는 그걸 알아채지 못했다. 혹시라도 그 일을 양가 어른들이 알게 될까 봐 쉬쉬 하기에만 급급했었다.
남편에게 맞고 길거리에 쓰러진 뒤 큰 병원에서 3일간 여러 검사를 마치고, 친정집 근처 조그만 병원으로 옮겨 입원해 일주일을 더 보냈다.
태어난 날부터 애지중지 키워 꽃가마에 태워 보낸 손녀딸이 패배한 권투선수 얼굴을 하고 3개월 만에 도로 온 걸 보면 외할머니가 충격받고 쓰러지실까 봐 친정집으로 가지 못하고 낡고 허름한 병원에 숨어 요양을 했다.
병원밥을 먹고 있는 내 신세가 비참했다.
저녁이면 창틀에 걸쳐진 노을을 한참 보면서 노을처럼 망망대해 속으로 가라앉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곤 해가 다시 떠오르는 내일이 오면 모든 상황이 결혼 전으로 돌아가 있길 간절히 바랬다.
입원해 있는 동안 엄마와 새아빠가 매일 면회를 왔다.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다가 엄마 얼굴을 보기만 하면 득달같이 매달려 우리 집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울며 빌었다. 결혼 따위 싫으니 제발 나를 다시 그곳에 보내지 말아 달라고. 제발..
혼인신고도 아직 안 했겠다, 부어터진 얼굴만 가라앉으면 결혼 전으로, 우리 집으로 다시 갈 수 있다고 믿었다.
남편 따귀라도 올려 부치고 내 딸 너 같은 놈에게 못 보내니 결혼은 없었던 일로 하자고 으악질을 할 줄 알았던 엄마였다. 엄마 성격이면 당연히 그래야 했다.
그런데 엄마는 눈앞에 만신창이가 되어 누워있는 나를 보면서도 친척들 전부 모아놓고 강남 한복판에서 화려한 결혼식을 올려놨으니 그건 절대 안 된다고 딱 잘랐다.
툭하면 내 머리통을 갈기고, 머리채를 잡아 뒤흔들던 엄마는 정작 내가 남에게 맞아 입원을 하니 갑자기 온순하고 평범한 남의 엄마처럼 굴었다.
나르시시스트임이 분명하다. 본인도 남편에게 맞다가 이혼을 경험했다. 남들 앞에서 화려한 자식 결혼식을 뽐냈던 만족감이 앞으로 어떤 암흑을 걸어갈지 모르는 딸의 인생보다 중요한 거였다.
매일 울어도 매일 안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심장이 끓어올랐다.
손목을 긋고 내일 아침 나를 찾아온 엄마에게 싸늘하고 딱딱하게 굳은 내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상상을 매일밤 하곤 했다. 결혼 전 남편집으로 떠밀며 평범하게 살면 된다던 엄마에게 그 결혼이 얼마나 평범하지 않은 것이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다 할머니와 어린 동생이 떠올라서 이내 고개를 젓고 입을 틀어막으며 충동을 삼켜냈다. 내가 좋은 집안, 좋은 남자에게 시집가서 행복하게 살 줄로 믿는 둘이었다. 바로 코앞에 내가 병원신세를 지고 있으리라는 건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내가 죽었다는 건 더더욱..
그 밤들을 일주일 동안 혼자 온 마음을 비틀며 견뎠다.
퇴원하는 날 남편이 데리러 왔다. 다신 그러지 않겠다고 무릎을 꿇고 눈물도 짜내며 잘못을 빌었지만, 난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어떠한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건 아무 말 없이 남편손에 끌려가는 나를 바라보는 엄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마음속으로 '파이팅'이라도 외치는 듯 희망 따위를 품은 얼굴을 하고 나를 보냈다.
지옥으로 돌아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