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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방불명의 시간

by 방재원 Mar 23. 2025

 


길이 끊겼다. 구글맵의 파란 점은 분명 직진하라고 재촉하는데 지하철 한 량 정도의 물줄기 폭이 가로막고 있다. 가로등 하나 없는 컴컴한 강변에서 허리 높이까지 오는 캐리어를 들고 서성거린다. 기차역부터 삼십여 분, 땀으로 범벅된 외투를 벗으려다 강길을 따라 불어오는 쌀쌀한 가을바람에 주섬주섬 옷깃을 여민다. 비스듬히 고개를 빼어 보니 저 멀리 아치 모양의 다리가 보인다. 돌밭길을 견디지 못하고 바퀴가 빠져 버린 가방을 들고 다리를 건널 엄두가 나지 않는다. 십여 걸음 뒤에 한 줄로 선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고 조금 후 도착한 작은 배에 서둘러 몸을 실어 강건너편에 다다른다. 카탈로그와 옷가지가 잔뜩 든 가방을 들고 삼 층 호텔 방에 한 걸음씩 올라 침대 위에 그대로 쓰러진다.


 날이 밝으니 간밤을 지낸 방이 얼마나 좁은지 실감이 난다. 졸졸 나오는 샤워 물줄기에 피곤이 덜 풀린 몸을 맡기고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연다. 가지런한 모양의 적갈색 벽돌 벽이 시야를 잠식한다. 옅은 한숨을 뱉고 서둘러 거리로 나선다. 구불구불 길을 따라 십분 쯤 걸었을까... 드디어 눈에 익은 광장을 마주한다. 네모 반듯한 텅 빈 공간을 채우고 있는 비둘기 떼, 한편에 우뚝 솟은 시계탑, 좌우로 정렬한 아케이드를 지나 정면에 자리 잡은 돔 형태의 회색빛 성당으로 자연스레 몸이 이끌린다.


 

 성당 정문을 지키는 네 마리의 청동 말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군데군데 깊게 파인 흔적들을 감출 수 없다. 십자군 원정 때 동방의 제국에서 약탈해  말 조각상. 얼마 간의 시간이 흘러 거꾸로 외부의 침입을 받았을 때 금박으로 오인하여 마구 할퀴어진 자국들. 지금 이 순간에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반목과 갈등은 훗날 사람들에게 어떤 상흔으로 남을지, 성당 안으로 들어갈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오른편으로 발길을 돌려 페리 선착장으로 향한다. 한 시간 여 배를 타도 알록달록 무지개 빛깔의 섬에 다다른다. 우리에게는 아이유가 뮤직비디오를 찍은 장소로 유명한 그곳. 실은 겨울 바다 안개에 대비해 건물 외벽을 빨갛고 파랗게 칠해서 이정표로 삼았다고 하는 데, 이제는 팍팍한 현실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픈 사람들의 도피처가 되었다. 동화 같은 풍경을 배경 삼아 참 오랜만에 셀카를 찍는다. 눈부신 햇살에 살짝 찡그린 얼굴과 어색한 미소, 조금씩 후진하는 앞 머리와 하얗게 내려앉은 구레나룻을 감출 수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맥주 한 잔을 주문한다. 한 모금 들이키려는 데 알람이 울린다. 고층 빌딩 뒤편으로 사그라드는 주홍빛 하늘이 한 폭의 그림에 담겨 있다. 승진을 앞두고 뜻하지 않은 구설수에 휘말려 퇴사를 고민하는 친구. 녀석은 요즘 퇴근 후에 카페에 들러 그림을 그린다. 덤덤한 표정으로 아무 일 없다는 듯 낮 시간을 견디고 저녁이 되면 그림 뒤에서 숨을 고른다. 거품이 가득한 맥주 한 잔을 더 시켜 잔을 서로 부딪힌다. 이 또한, 지나가리...


 본 섬으로 돌아와 전날 밤 언뜻 보였던 다리 위에 선다. 북적이는 시장을 빠져나오는 동안 벌써 피곤함이 몰려온다. 숙소 위치를 검색하려다 휴대폰을 끈다. 어차피 광장 쪽으로 가면 되니까... 촘촘히 얽히고설킨 소로를 따라 걷는다. 십여 년 전 톨레도 골목길을 헤맸던 기억이 겹쳐진다. 작은 화면창 속의 화살표 대신 지도 한 장 달랑 가지고 들른 그곳. 레드 와인 한 잔의 취기로 갖가지 상념을 흩뿌리며 다녔던 그날의 발자취를 좇아 다시 한번 미로 속으로 빠져 든다.



 맞은편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뒤로 물러서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옆으로 서서 게걸음으로 어깨너비의 통로를 엇갈려 지나친다. 가벼운 눈인사와 함께. 몇 차례 나선 형의 좁은 길을 통해 나오니 형형색색의 유리공예집이 줄 지어 있다. 체리빛 그라데이션 처리가 되어 있는 조그만 술잔에 시선을 뺏긴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불과 두어 달 후 마스크 뒤에 숨어서 이 조그만 잔에 수많은 저녁을 의지하게 될 줄은.


 유리 가게를 지나 조금 더 걸으니 화려한 문양의 가면들이 시선을 붙잡는다. 흰색과 검은색 바탕의 데칼코마니부터 메두사 머리 모양, 그리고 한쪽 눈만 치켜 세운 듯 뿔이 달린 가면 뒤에서 비로소 우리는 자신을 내려놓는다. 갖가지 소속과 역할들을 놓아 버리고 우리가 함께 정한 암묵적인 기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한다. 가면을 쓴 순간 우리는 스스로 사라지는 동시에 충만케 된다.



 두어 시간쯤 걸었을까... 다시 찾아온 어둠 속에 발길이 닿은 곳은 운하를 사이에 둔 노천카페거리. 목적지와는 반대편이지만 개의치 않는다. 오징어 먹물 리조또와 화이트 와인 한 잔으로 허기를 달랜다. 출렁대는 검은 강물 위로 수로 변의 건물들이 빛에 반사되어 흔들린다. 불안과 강박으로 혹여나 나에 대한 통제권을 잃을까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나날들... 지금 만큼은 마음속 CCTV 전원을 끄고 넘실거리는 물결에 나를 흘려보낸다.


 어느덧 자정 즈음. 조금 후면 아내가 세 아이와 등교 전쟁을 벌일 시간이다. 녹화 방송을 틀어놓은 듯 매번 똑같이 되풀이되는 지난한 실랑이. 한 놈이 좀 잠잠하면 다른 놈이 무언 가에 심사가 뒤틀려 이불을 뒤집어쓴 채 시위를 한다. 두더지 게임 같은 아침이 지나면 아내는 암막 커튼을 내리고 다시 잠을 청한다. 벽에 바짝 붙어서 모로 누워 있는 아내의 뒷모습에서 '엄마'라는 이름 뒤에 사라진 그녀의 흔적을 더듬어 본다. 오늘이 지나면 나 또한 삭제된 일상으로 되돌아간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다음 날은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공항으로 가려고 길을 나서는 데 이미 발목까지 물이 차있다.  물이 덜 고인 곳으로 팔짝팔짝 무거운 몸을 일으키기를 반복하다 어느새 장화를 신은 사람들 뒤를 쫓아 무릎까지 차오른 물살을 헤치고 나간다. 운동화는 물론 바지까지 흠뻑 젖었지만 찜찜한 느낌과 소모적인 걱정은 그만하기로 한다. 대신 지중해 바람에 섞여 날려 온 내음에 취하고 싶다.



 공항까지 향하는 여정도 배에 의지해야 한다. 운하 곳곳에서 사람들을 태운 배는 몇몇 섬들을 지나쳐 아드리아 해에 다다른다.  꺼진 핸드폰을 켜본다. 하늘색 바탕 위에 파랑색 점 하나가 빨간색 꼬리표를 향해 12시 방향으로 조금씩 움직인다. 수백 년 전 이 땅의 사람들이 바다 깊숙이 박아 놓은 말뚝 서너 개만 자욱한 안갯속에 부유하다 이내 굵어지는 빗줄기 사이로 사라진다. 어느새 액정 화면 속 우리를 인도하던 파란 점도 검푸른 파도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 이 글은 오 년 전 잠시 들렀던 베네치아에서의 기억을 더듬어 현재의 내가 당시 나의 뒷모습을 좇는다는 생각으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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