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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꽃 Jul 25. 2024

나만 해내지 못하는 과제

임신이라는 인생의 한 챕터

어제는 내게 그야말로 운수 좋은 날이었다.
하루 종일 비는 많이 내렸어도 모든 상황들이 다 좋았다.
그림도 예쁘게 완성하고, 카페에서 카푸치노 거품도 딱 적당하게 마음에 들게 만들었고 좋아하는 장르의 책도 술술 읽혀 앉은자리에서 다 읽었다.
요 며칠 그런대로 괜찮은 날들을 보냈기에 그날의 내 감정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날 하루가 너무 행복했기에 왠지 모를 자신감까지 생겨서
이 상태로라면 시골에서도 내가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화근이었다.
잠시 내가 너무 행복해서 잊고 있었다.
나는 행복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모처럼 기분 좋게 완벽한 하루를 보내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보다 카톡 친구 생일에 뜬 친구에게 뒤늦은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가 둘째가 생겨버렸다는 얘기를 들었고,
그때쯤 잘 시간이 되어서야 느지막이 퇴근한 남편은 직장에서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직장동료 와이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곤 그때부터 잠도 못 자고 울었다.
내가 등 돌리고 훌쩍거리는 걸 본 남편도 내가 울면 마음이 아프다며 날 안고 달래줬다.
밤새 잠이 오질 않아 뒤척였고 잠깐 잠들었을 때엔 꿈속에서 여러 사람이 날 비난하는 악몽을 꾸다 깼다.
덕분에 나는 아침부터 기분이 매우 저기압인 상태로 하루를 시작해야 했다.
불과 남편 친구들 모임에서 우리만 임신을 안 했다는 이유로 기분이 상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연달아 들리는 주변 사람들의 임신 소식은 날 더 스트레스 속에 몰아갔다.




하루를 행복으로 채워가기 위해 시작했던 내 아침 루틴들은 다 하지 않은 채 침대에 숨어
몇 시간 내내 또다시 날 비난하고 자책하기 시작했고,

'왜 남들에겐 이렇게 쉬운 일이 나만 안되지?
그러고 보니 지난주에 남편 친구도 애를 원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생겨버렸다고 했는데,
얘도 둘째가 생겨버렸다고 하네.
생기면 생긴 거지 생겨버린 건 또 뭐야.
다른 사람에겐 어쩌다 생겨버린 일이 왜 나한텐 간절해도 안 생기는 건데.'

하면서 남들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이 내게만 어려운 일인 것 같아 속상한 마음에 침대 속에서 눈물만 흘렸다.
한참 울다 어둠 속에서 핸드폰을 찾아서는 또다시 배란테스트기며 임신테스트기를 종류별로 주문했고
어제부터 갓생을 살기 위해 시작한 요가도, 뭣도 하지 않은 상태로 또다시 임신에 골몰하며 그렇게 깊은 어둠 속에 잠식되고 있었다.
지금의 내 감정은 폭주하는 기관차였다.
나는 한번 어둠 속에 빠져들면 헤어 나오기 쉽지 않다.
이러지 않으려고 며칠 노력했는데.
내가 쉽게 이런 상태에 빠질 것 같아 요즘 예민한 내 상태를 부단히 살피고 살폈었는데.
이러려고 요 며칠 행복했나 싶었다.
잘 살려고 노력하다가도
다른 사람들의 임신 소식들에 나는 한없이 무력했다.
임신에서 한 발자국 멀어져
나를 지키기 위한 내 노력은 또다시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곧이어 내가 임신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고 한순간, 내가 희미하게나마 잡고 있던 내 행복의 끈을 놓아버리기엔 충분했다.
임신이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또다시 간신히 벗어났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임신을 생각하지 않고 지내려 할수록 어느 순간부터 임신은 더 무서운 존재로 커져서 자꾸만 내 곁에 파고들고 있었다.
첩첩산중의 우리 동네에는 젊은 부부가 많이 살아 유독 어린 아기들 울음소리가 자주 난다.
나는 그 시간이 너무 괴롭다.
아기 울음소리가 창을 넘어 우리 집까지 들어올 때면 나도 같이 운다.
한 번씩 바깥을 바라보면 아기를 안은 부부들도 보이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마치 못 볼 걸 본 것처럼 집안으로 달려들어와 숨는다.
최근엔 길을 가다가도 임산부를 보거나 임산부 배지를 보면 죄지은 사람처럼 손을 덜덜 떨고 안절부절못하고 심하게 불안해하며 멀리서부터 가던 길을 멀리 돌아 피한다.
어느 순간 나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반복된 유산과 임신에 대한 압박이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억울했다.
순전히 임신 준비를 위해 퇴사도 하고,
임신 준비를 위해 고향에서도 먼 이 시골로 오면서 내 삶 모두를 포기하고 왔는데도 몇 달간 임신이 되질 않으니 미칠 것 같았고
나만 임신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해야 하는 게 억울했다.
난 다 포기하고 내 생에 딱 하나만 바라는 건데 그 하나조차도 이루지 못하는 건가 싶어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나도 뭔가 하고 싶고 인생에 계획을 세우고 싶은데,
뭘 하려고 했다가도
'임신을 하게 되면 교대 근무를 못하니 입사하자마자 일을 관둬야 하나?'
어쩌다 시골에서 괜찮은 조건의 자리를 찾았을지라도
'임신 계획이 있다고 하면 반길 곳은 없으니 포기해야겠다'
하는 생각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하루하루 눈물로 지새웠다.
내 앞으로의 일상과 인생계획에 언제 성공할지 모르는 임신이 염두에 놓여있어야 하는 게 어느 순간부터는 큰 장애물로 느껴졌다.
임신 준비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나 스스로도 나를 임신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지금 내가 보내는 이 시간들은
내가 임신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 성공하지 못하면 그저 버린 시간일 뿐이었다.
또다시 벗어나려 했던 괴로운 시간이 반복되고 있었다.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난 뭘 해도 자격 없고 못난 사람이었다.




이쯤 되니 무엇 때문에 내가 임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다른 사람들은 가정 안에서 더 행복해지려고 임신을 결심하는 반면, 나는 임신이라는 업무를 해내야 내가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일단 임신부터 해내면 내가 뭐든 다시 시작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당장에 해 내야 할 과제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그 이후의 내 행복이나 미래 같은 건 임신을 하기만 한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내겐 당장의 시작도 어렵다.
그 어떤 과제보다 너무 어려운 과제다.
노력한다고 이룰 수 있는 과제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마 평생 못 풀 과제.
남들은 다 척척해내는데 나만 해내지 못하는 과제.
나한테만 어려운 과제로 언제까지 나를 괴롭힐지 모르겠다.


너무 괴롭다.
나는 충분히 지쳤고 힘들다.
여기서 뭘 더 할 에너지도 없다.
이제 다 그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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