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시골살이를 한지 8개월에 접어들었다. 추운 겨울에 화천에 왔는데, 여름엔 생각지도 못한 폭염을 지나 곧 다시 겨울이 찾아오고 있다.
곧 찾아올 겨울을 맞이하기 위해 나는 초록의 싱그러움이 사라지기 전에 열심히 찾아 다녔다.
이곳은 달라지는 계절마다 곳곳에 예쁜 꽃들이 피었다. 오랜만에 나간 화천 읍내에서 누군가 심어놓은 예쁜 꽃들을 마주친 날.
길을 걷다가 계절 꽃들을 마주치면 한참 멈춰 서서 사진을 찍는다. 잠시 피어있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온 힘을 다해 피어있는 색색깔의 꽃망울들을 더 오래 눈에 담고 싶었다.
비가 온 날 뒷산에 안개가 걸쳐있는 걸 보는 건 장관이다. 아마 집 뒷산 뷰는 우리 집 만 한곳이 없을 거라 생각해 본다. 나는 종종 베란다에 서서 높은 산맥을 따라 구름이 이동하는 걸 넋 놓고 보고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순간은
비가 오고 잠시 구름 뒤로 해가 뜨는 순간이다. 안 그래도 산중 생활을 해야 하는 나는 비 오는 날은 고립된 느낌이 들어 시골에서 비가 오는 걸 제일 싫어하는데 비가 그치고 난 뒤의 이곳은 더 푸르러서 요즘은 그 순간도 좋아해 보려 한다. 자주 볼 수 없기에 더 소중한, 해가 뜨는 순간.
이번 주는 읍내의 도서관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들을 빌려 하루 종일 읽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다 보면 여기가 소설 속 세상인지, 현실인지 조금은 감각이 사라진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니 날이 맑다. 불과 전날의 비와 구름은 환상이었던 듯싶을 정도로 눈부신 풍경.
서둘러 감자를 삶고 닭갈비 볶음밥과 계란말이를 만들어 남편을 출근시키고, 간단하게 요가를 하고 청소를 했다.
뭘 할까 고민하다 간단하게 참치 새싹비빔밥을 해먹고, 아직 낮엔 너무 더우니 낮 동안 책을 읽기로 결정했다.
책을 읽던 와중에 익숙하게 과일 이름을 읊는 녹음 테이프 소리가 들려와 베란다로 나가보니 주기적으로 오는 과일트럭 아저씨가 보인다. 읍내에서 먼 우리 동네에는 한 번씩 과일차 아저씨나 생선을 소금에 절여 트럭에 넣고 다니며 파는 아저씨를 본다. 종종 오는 과일 차 아저씨를 보면 괜스레 반가워서 사지는 않더라도 올 때마다 밖을 빼꼼 쳐다본다.
또다시 클래식을 켜놓고 암막 커튼을 닫아놓은 채로 책도 읽고 글도 쓰며 시간을 보니 어느덧 초저녁이다. 더 늦어지면 동네 강아지들을 보러 가는 길이 너무 어두워서 서둘러 산책을 나섰다.
내가 늘 보러 가는 동네 귀여운 강아지들. 이곳에 사는 유일한 낙이라면, 여기저기 묶여있는 강아지들을 보러 산책을 나가는 일이다.
내가 가까워질 때부터 달려 나와 보고, 떠나는 순간에도 따라오며 망부석처럼 지켜보는 사랑 가득한 눈망울. 시골의 강아지들은 성격도 제각각인데 보통 경계하거나 어두운 강아지가 많은 반면에, 꽤 많은 강아지들은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눈빛으로 사람을 반긴다.
루틴처럼 체육공원에 묶여있는 강아지를 보고 난 후엔 시골길을 따라 다음 강아지를 보러 슬슬 걸어간다.
가면서는 자연들도 천천히 둘러봤다.
내가 늘 강아지를 보러 가는 길에 밤송이들이 부쩍 커졌다. 정말 가을이 오고 있긴 하구나 싶던 순간.
저 멀리 높은 산에는 조금씩 울긋불긋 해지기 시작했다. 곧 다시 찾아올 강원도의 겨울이 조금 두렵다.
자연을 열심히 보며 걷다 보면 또다시 마주치는 귀여운 강아지. 멀리서부터 꼬리를 흔들고 오두방정을 떨며 반겨주는 바람에 나도 정신없이 달려가 쓰다듬는다.
아무런 대가 없이 무한한 사랑을 주는 강아지들을 닮고 싶다. 나를 이곳에서 하루씩 더 살게 하는 고마운 존재. 시골에 살며 늘 외로웠던 내 삶이,
시골길 곳곳에 있는 강아지들을 만난 후엔 조금은 덜 외롭다.
아침엔 눈을 뜨자마자 다이소에서 사 왔던 방울토마토 기르기를 심어봤다. 내가 새로 키우고 있는 로즈마리 옆에 뒀다.
그러고 보니 몇 달 새 쑥쑥 커버린 몬스테라. 큰 화분으로 옮겨준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뿌리가 자꾸만 밖으로 빠져나온다.. 도대체 얼마나 자라려는 걸까..? 조금은 두렵다,,
오늘은 아침부터 금강산 갈비찜이 먹고 싶던 날이었다.
포천에 있는 식당이라 너무 멀긴 했지만 어차피 매일 시간을 '잘' 보내는게 숙제인 나로서는 포천까지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집에서 편도로 한 시간이 훨씬 넘는 거리이지만 너무 먹고 싶어서 간 김에 예쁜 카페도 들렸다 올 요량으로 찾았다. 지난번에 열한시쯤 도착했을 때 웨이팅이 길어 열시쯤 도착했더니 텅 비어있었다.
처음 보는 이곳의 텅 빈 풍경! 아니나 다를까 곧 사람이 다 차서 만석이 되긴 했다. 그래도 혼자 꿋꿋하게 혼밥을 하고, 남편 줄 것도 포장을 해왔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뷰가 정말 좋았던 청계호수 앞 카페. 청계호수는 처음 와봤는데, 한적하고 평온한 분위기가 산정호수와는 다르게 좋았다.
오랜만에 여유롭게 강가 앞에서 머물렀던 평화로운 시간.
올라오던 길에 포천 이동면에 위치한 브릭 스퀘어 카페도 들렀다. 정원도 잘 가꿔져 있고 자연으로 둘러싸여 쉬기 좋았던 곳. 귀여운 강아지가 있다고 해서 찾고 싶었던 곳이다.
사람을 정말 반기고 좋아했던 귀염둥이. 내가 자리를 잡자마자 저벅저벅 걸어와 내 옆에 앉아서 쉬길래 나도 강아지를 쓰다듬으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내가 떠날 채비를 하니 먼저 쿨하게 나서던 빵실한 뒷모습..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열심히 다시 화천으로 올라와 곧장 토마토 시네마에 왔다. 이날 개봉한 영화인 <안녕, 할부지> 를 보기 위해서였다. 어떤 날엔 단체로 온 군인들 옆에 혼자 앉아 영화를 보기도 하는데, 이날은 전세 낸 듯 혼자 봐서 좋았다.
작은 시네마의 가격은 7천 원이다. 신작이 나올 때마다 바로 상영된다. 물론 하루에 한편 정도라, 시간을 맞춰서 와야 하지만.. 이것도 시골살이의 메리트라면 메리트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푸바오가 어릴 때 한 번 보러 간 게 다여서 큰 감흥은 없을 줄 알았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는 정말 줄줄 울었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본건 처음인데 어떤 영화보다 감동적이었다.
아마 사육사님들의 진심이 담겨있어서 더 좋았던 것 같다.
한참을 혼자 놀다 집으로 향하던 길, 읍내의 정겨운 풍경. 높은 건물이 없는 이곳은 어디서 봐도 산이 보인다. 문득 내가 사는 이곳이 참 좋아지던 순간
"자연 속에서 지내는 것은 분명히 멋진 일이지만, 거기서 생활해 나가는 것은 쉽지 않지"
"자연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부자연스러운 것이고 평온함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위협적인 거야. 그 같은 배반성을 잘 받아들이려면, 그 나름의 준비와 경험이 필요해."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자연에서 살면서 평온함이 위협적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이곳에 있으면 시간이 지나는 걸 계절로만 느끼기 때문이다. 그만큼 시간이 금방 흐르고 하루하루 지나는 게 빛과 같다. 충청도의 시골에서 살다 와서 시골생활은 자신 있다고 생각했지만 여기서의 생활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열악한 시골이었다. 나는 이만한 시골을 겪어볼 준비와 경험이 없었기에 생각보다 더 시골인 여기서의 삶이 지금도 힘든 걸지도 모르겠다. 8개월이 지나면 '좀 살만한데?'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아직도 힘들다. 나는 아마 떠날 때까지 이곳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떠나는 날까지 내가 사는 곳을 마음껏 사랑해야지. 조금 힘들지라도 훗날 돌아보면 내 삶에 빛났던 시간이 될 지도 모르니까.
이 곳에서의 생활이 행복일지 고난일지는 결국 내 마음이니까, 매일의 내 일상과 내 곁의 자연을 더 사랑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