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값진 사치

by 홍미

매일 새벽같이 울리던 알람이 사라지고, 더 이상 출퇴근 지옥철을 경험하지 않아도 된다.

읽어도 계속해서 쌓이는 메일을 쳐내느라 애쓰지 않아도 되고, 팀장님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월말마다 야근으로 피폐해진 얼굴로 집에 갈 일도 없고, 잦은 회식 때문에 숙취에 시달리는 것도 끝났다.


처음 맞이한 갑작스러운 퇴사는 내 일상을 정말 많이 바꿔놨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라는 말처럼, 한 순간 텅 빈 세상에 혼자 툭 떨어진 느낌이었다.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불안감이 극심하게 몰려오는 강박증을 갖고 있는 나에겐 정말 큰 변화였다.

일단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자고 다짐했지만, 막상 퇴사 후 몇 주 간은 극심한 불안함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더 이상 어리지 않은 서른이란 나이에 백수가 되었으니, 맘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불안한 날들도, 오히려 시간이 지나니 점차 안정이 되었다.

그제야 내가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에 대해, 집중하며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퇴사라는 큰 결정을 한 김에, 언제 또 올지 모르는 이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먼저 하고 싶었던 일들을 두서없이 노트에 줄줄 써 내려갔다.

'여행, 운동, 글쓰기, 템플스테이, 영어공부, 피부관리...'

사실 이 모든 것들을 함에 있어서, 백수에겐 현실적으로 돈이 가장 큰 걸림돌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돈에 구애를 받으며, 하고 싶은 것을 못하고 그저 시간을 허비하고 싶진 않았다.

모아둔 비상금을 털어서, 흔히들 말하는 직장인들의 워너비 자칭 '돈 많은 백수'가 되었다.


평소 운동에 관심이 많아서, 이번에 제대로 배우자는 생각으로 먼저 PT를 통 크게 결제했다.

운동 자세와 식단을 배우며 몸의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고, 어느새 운동은 하루를 여는 첫 번째 일과가 되었다.

내가 하는 일에 있어서도 중요했고, 또 잘하고 싶은 것 중 하나인 영어도 놓칠 수 없었다.

그래서 매일 아침, 미국인 선생님과 1시간씩 대화를 나누며 영어를 내 일상에 들여놓았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관리를 해야 한다는 피부관리도 받기 시작했다.

그동안 야근과 스트레스로 지친 피부를 보면서도, 피곤하다는 이유로 늘 미뤄왔던 일 중에 하나였다.

부모님은 가끔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며 의아해하셨지만, 나는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이제는 외모도 능력 중 하나이기에, 스스로를 가꾸는 일 또한 중요하다고 말이다.


이렇게 작은 루틴들이 쌓이면서, 내 백수생활은 알차고 더 단단해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백수에 걸맞지 않은 사치라고 생각할 순 있어도, 나는 이제 그런 말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요즘 나는 스스로를 한층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중에 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잠깐의 쉼이 앞으로 나아갈 에너지를 그리고 값진 경험을 선사하는 것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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