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일주일 정도 열심히 써 온 다이어리 앞장을 과감히 찢어버렸다.
다이어리 맨 앞에 한 달 치 분량으로 일정을 적거나 간단한 메모를 기록할 수 있는 페이지였다.
일주일 정도 예쁘게 썼는데, 오늘 정신없이 적다가 잉크가 번져버렸기 때문이다.
지저분하게 묻어버린 잉크를 수정 테이프로 지워봤지만, 역시 못나보였다.
이미 적어둔 메모들이 아깝긴 해도, '일부를 망쳐버렸으니, 찢고 다시 적는 수밖에'
카드 결제 후 서명할 때조차 삐져나오지 않게 적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출입문에 적힌 ‘당기시오’를 보면, 무조건 당겨서 열어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
이렇게 나의 강박 같은 완벽주의 성향은 이미 삼십 년째 굳어져, 온몸에 스며든 상태다.
주변에서는 너무 피곤하게 산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완벽함을 추구해야 한다는 내 신념은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굳건했던 나의 완벽주의를 깨뜨리기 시작한 건 우연히 SNS에서 본 짧은 영상이었다.
지루한 퇴근길, 지하철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영상은 '너 아직 그 정도 아니야'라는 말로 시작했다.
승부욕 강한 나로서는 더욱 눈길이 가는 문장이었다.
영상 속 사연자는 거의 내 일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나와 똑 닮아 있었다.
그녀 또한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조금만 틀어져도 다시 엎어버리고 시작하는 성향이었다.
이미 충분히 결과물을 만든 이후에도, 조바심이 나서 다시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스트레스를 받는 성격.
그런 그녀에게 심리치료사는 '아직 그 정도 급 아니라고 생각해 보세요'라고 했다.
처음 말을 들었을 땐 묘하게 기분이 나빴는데, 이어지는 설명에 어느새 나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항상 모든 걸 너무 완벽하게 하려고 했을 때 오히려 실수를 하거나, 더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나요?
우리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에요. 열심히 하더라도 언제든 실수를 할 순 있어요.
그래서 잠깐의 실수 때문에, 그간 이뤄온 것들을 모두 엎어버리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에요.
잠시 길을 잃었다고 해서,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그는 완벽주의 성향으로 너무 스트레스받을 땐, 스스로에게 가볍게 이 말을 던져보라고 했다.
"너 아직 그 정도 급 아니야, 우리는 신도 아니고 인간이잖아!"
짧은 영상 하나에 꽤 많은 걸 느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자꾸만 그 문장이 맴돌았다.
그렇게 마음을 좀 내려놓으니, 오랜만에 바른 매니큐어가 살짝 삐져나온 것조차 오히려 힙하게 보였다.
예전 같았으면 지우고 또 바르고를 반복하며 몇 시간을 낑낑거렸을 테지만.
오늘은 그냥 예뻐진 손톱을 보며, 조용히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누군가 이 글을 본다면, 오늘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하진 않았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오늘의 깨달음이 또 언제 흐트러질지는 모르지만, 그럴 때마다 다시 이 말을 떠올리면 되니까.
'너 아직 그 정도 급 아니야. 지금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