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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플수니 May 07. 2024

제2화. 착한아이 콤플렉스

7.


"응애, 응애, 응애"


35년 전, 쾌쾌하고 곰팡이 냄새가 섞인 음습한 공기를 뚫고 병원 복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며 태어난 아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들리는 "아이고... 아이고..." 하며 복도에 울리는 곡소리. 아기의 탄생을 알리는 우렁찬 울음소리가 무색하게 가족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80년대 관공서나 상가건물이라면 어디든지 깔려있던 차디찬 진회색 도끼다시 바닥에 주저앉아 튀어나온 황동줄눈에 옷자락이 뜯기는 줄도 모르고 고운 옥가락지를 낀 손으로 바닥을 치며 쓰잘 떼기 없이 웬 딸랑구가 태어났냐며 고래고래 지르며 울고 있던 우리 친할머니. 그리고 급성 임신중독증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후 힘겹게 아이를 낳고 퉁퉁 부어버린 몸 하나 가눌 길 없던 우리 엄마. 거기서 우리 셋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아고... 양수 터져도 암시랑 안 해야...!"


할머니는 아침에 울컥하며 터져버린 양수에 어쩔 줄 몰라하는 엄마에게 유난 떨지 말라고 양수 터진 산모를 반나절 이상 방치했다. 보다 못한 3층 할머니가 쫓아 내려와 이 할머니가 노망 났냐며 이러다 사람 잡는다고 난리난리를 친 끝에 우리 엄마는 병원에 가서 나를 낳을 수 있었다. 하지만 첫째에 이어 또 딸을 낳은 엄마는 우리 아들 사랑 대단하신 할머니 앞에서 면목이 없었고, 70 넘은 우리 할머니는 150센티도 안 되는 그 조그만 체구에서 어디 그런 힘이 나셨는지 고래고래 병원 바닥에 앉아 통곡을 하셨다고 한다.


 그때는 이미 파란 고추를 한 바구니 가득 따던 태몽을 꾸고 둘째는 아들이라며 신이 난 아빠가 온 동네에 막걸리턱을 수십 번도 낸 후였다. 그런 기대에 부응했어야 했는데.. 계획에 없던 양수가 터지는 바람에 급하게 나오느라 깜빡 잊고 뭐 하나 안 달고 나왔더니 그렇게 태어나자마자 나는 온 가족에게 외면당했다. 제왕절개 후 회복까지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딸딸아빠 확정 소식에 실망한 아빠는 한 번도 병원에 찾아오지 않았다. 게다가 출산 후 부기가 빠지기는커녕 몸이 안 좋아 더 불어버린 엄마는 나를 돌 볼 수 있는 여력이 없어 나는 그렇게 엄마 옆에 덩그러니 방치되어 누워 있었고 그런 나를 측은히 여긴 간호사분들이 돌아가며 나를 봐주시곤 했더랬다.


그렇게 태어나서도 예뻐하는 사람 하나 없는 집구석에서 난 눈치 없이 배앓이로 하루 왠종일 빽빽거리며 울어댔다. 애가 24시간 울어만 대니 엄마는 '애가 어디가 아파도 아프구나.'하고 나를 안고 이곳저곳 안 다닌 병원이 없었지만 그 옛날 배앓이에 대한 지식을 가진 의사가 많이 없었는지 다들 멀쩡한 애를 왜 데리고 왔냐고 돌려보냈다고 했다. 그러다 생후 2개월이 될 무렵 어느 한 나이가 지긋한 의사 선생님이 "애가 배앓이 하네요. 호프 먹이세요."라고 쪽지에 무언가를 적어 주셨고, 다행히 그것을 먹인 후 이유 없이 우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그 2개월 동안 이유 없이 밤낮 구분 없이 울어댄다고 우리 아빠는 시끄럽다며 나를 장롱 안에 정말 찰나의 시간동안 넣었다가 엄마랑 대판 했다는 소리까지.(나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치 어린 시절이 생각나는 것 마냥 눈물을 보이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정말 너무하다고 아빠를 쳐다보았고 아빠는 지난날 본인의 철없는 행동에 멋쩍어하시며 "그니까... 아무리 철이 없어도 내가 왜 그랬을까?" 하시며 늘 진심으로 미안해하셨다.)


난 어릴 때부터 이런 나의 탄생비화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수백 번도 넘게 들었다. 엄마는 엄마 나름대로 한이 맺혀 한 소리였겠지만, 나는 이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너무나 서글펐다.


'난 우리 집에서 미운오리새끼였나? 언니는 첫아이라고, 남동생은 나한테 없는 뭐 하나 달고 나왔다고 태어나자마자 받았던 그 당연한 사랑을 나는 이 집에서 받으려면 무언가 해야 받을 수 있겠구나.' 무의식 중에 그런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가치관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실제로 우리 친할머니의 손주차별은 매섭고 대단했다. 언니와 내가 싸우면 "아이고. 저 놈의 기집애가 언니한테 바락바락 대드는 거 보소!" 하셨고 나와 남동생이 싸우고 있으면 "누나가 되어서 동생을 봐줘야지! 저.. 저 저놈의 딸랑구가 끝까지 이겨 먹으려고 하는 거 보소!"하고 가슴을 치셨다.


'난 그럼 언제 이길 수 있는 거지?'


고작 커가면서 싸우는 애들 싸움에 본인 가슴 쳐대면서 망할 딸랑구가 자기 손주들 다 이겨먹는다고 우는 시늉을 하셨던 할머니에 그때도 억울해 숨죽여 이불 덮고 엉엉 울었지만, 다 큰 지금도 그때 기댈 곳 없이 혼자 내몰리며 혼자 숨죽여 울던 어린 나를 생각하면 울컥한다. 그때로 회귀할 수 있다면 좀 더 당차게 대들지 못하고 그리 울어댔던 어린 나를 꼭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리고 어린 나를 꼭 안은 채 어린아이에게 뭐 하는 짓이냐고 할머니에게 악을 쓰고 소리치고 싶다.(할머니는 돌아가신 후에도 이러한 일화들로 나에게 여기저기 뒷담화를 많이 당하셨다. 그래서 미안하신지 언제는 내 꿈에 나타나셔서 로또번호를 알려주신 적이 있는데, 내가 기억을 잘 못해 제대로 못 받아먹었다. )


물론 나도 초등학생 고학년이 되어서는 악에 받쳐서 "그만해! 쟤가 아들이라고 할머니 성을 이어 줄 것도 아니고 뭐가 그렇게 좋은데? 뭐.. 할머니도 여자라고 남자가 좋아?"라던지, 내 앞에서 맞벌이하는 엄마 살림 어쩐다저쩐다 흉보면 "내가 우리 엄마 편이지. 할머니 편이겠어? 듣기 싫으니까 나한테 우리 엄마 욕하지 마!" 하며 할머니 표현 따라 바락바락 대들기도 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세상 다 잃은 듯 일 나간 우리 아빠를 찾으며 우는 시늉을 하셨다. "아이고! 내가 오래 살았지. 오래 살아서 안 봐도 될 별 희한한 꼴을 다 보고 산다냐. 아이고 나 좀 데려가슈. 아이고 내가 죽어야지. 아이고 내가 죽어야지..." 하며 눈물바람을 하셨다. 하지만 내가 태어났을 때 날 홀대했던 우리 아빠는 내가 커감에 따라 나를 제일 예뻐하셨다. 그리고 내 눈물에 어쩔 줄 몰라하셨다. 그래서 할머니가 아빠에게 어떻게 이르던 나에게 별 타격은 없었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 그 우는 시늉은 견디기 힘들었다.


지긋지긋했던 그 '내가 죽어야지.' 레퍼토리. 내가 중학생 1학년이 되던 해 할머니의 병환으로 그 레퍼토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8.


인정 욕구. 내가 아닌 타인으로부터 찾아오는 나의 가치.


난 그게 남달랐다. 언니보다 남동생보다 더 많이 사랑받기 위해 무언갈 해야 한다고 늘 생각했던 것 같다. 맞벌이인 엄마 대신 어릴 때부터 방학이면 밥, 살림을 처음엔 자처했고, 나중엔 내가 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하지만 야무지지 못한 손끝으로 맨날 엄마한테 열심히 해놓고도 욕만 먹었다. 이상하게 엄마는 언니와 같은 말을 해도 언니는 예뻐했고, 나는 미워했다. 그러다 어느 날 엄마가 우는 나를 데리고 진지하게 말한 적이 있다.


"난 네가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지독하게도 나를 닮아서.. 가끔 네가 너무 징그럽고 소름 돋아."


엄마는 그런 얘기를 왜 어린 나를 붙잡아놓고 이야기했을까? 나는 침대에 걸쳐 앉아 그 이야기를 들으며 꺼이꺼이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 이후 엄마 사랑에 더 집착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엄마의 대가 없는 온전한 사랑을 받는 쉽지 않았다. 맨날 얻어들었고 그때마다 나는 아무 말 못 하고 침대로 이불을 옴팡 뒤집어쓰고 우는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와 언니는 말했다. 내가 초소심한 A형이 맨날 저렇게 운다고. 쟤한테는 무서워서 말을 못 하겠다고.


사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땐 몰랐지만 우리 엄마는 오랜 시간 우울증을 겪은 듯했다. 어쩌면 엄마는 본인의 상태에 대해 알았을지도 모르지만 뭐 딱히 알았어도..? 그 시대는 다들 그랬다. 뭐 우울증이라고 요즘처럼 정신과 찾아가서 약을 타 먹고 그런 풍조가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정신과는 정말 미친 사람만 가는 그런 곳이었으니까. 알았어도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엄마는 늘 화가 나면 참지 못하고 어금니를 꽉 깨물고 이를 갈며 온갖 욕과 함께 사자후를 토해내듯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그때마다 난 엄마가 너무 무서워 아빠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기억에 엄마는 아빠가 없을 때 나에게 더 소리를 많이 질렀던 기억이 있다. 아빠는 내 눈물에 약해서 엄마가 나에게 소리 지르면 애 그만 잡으라고 화내셨으니까. 난 그래서 우리 엄마가 계모인 줄 알았다.


그렇게 소심했던 나는 더 많은 사랑을 받기 위해 삐뚤어지기보단 착한아이가 되기로 결심했다. 착하진 않지만 착한 아이인 듯 그렇게 연기하기로. 모두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방법은 그거였던 것 같다.





9.


어두운 차 안 좌회전을 하기 위해 남자친구가 켜둔 깜빡이 소리가 똑딱- 똑딱- 유난히 크게 들리고 있었다.



몇 해 전 호주로 워킹홀레데이를 떠나기 앞서 호주가 그렇게 밤하늘로 유명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자연경관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멋있다며. 몽상가적 기질이 풍부한 난 무용한 밤하늘, 우주, 미래, 영혼, 전생.. 이런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 난 황홀한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그리고 쏟아지는 별들을 내 두 눈에 담고 직접 싶어 호주로 떠나기 바로 몇 주 전 망설임 없이 라섹수술을 강행했다. 그리고 의도치 않았지만 남들이 누차 호소하던 야맹증과 빛번짐을 부작용으로 얻었다. 그러한 연유로 밤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들과 은하수 대신 앞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는 브레이크등과 신호등에서 사방으로 발산되는 빛줄기들을 눈이 부시게 가득 담고 있었다.


남자친구와 나는 결혼을 전제로 울산에서 서울까지 장거리연애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비신랑의 자격으로 아빠 생신파티에 같이 참석한 후 울산에서 서울까지 올라온 그와 둘만의 데이트를 하러 나가는 길, 나는 가족과의 저녁식사가 끝난 후 뭔가 말할 수 없는 기운에 지쳐 아무 말없이 정면을 응시한 채 멍하니 보조석에 앉아 있었다. 그 때 남자친구인 희야씨 신호를 기다리며 두툼하고 큰 손을 내 손 위에 포개 얹으며 말했다.


"아고.. 우리 수니한테 이런 모습이 있었네.."


희야씨의 말이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 보았더니 그는 나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내 손에 포개 얹은 큰 손으로 두어 번 내 손을 토닥였다. 그에게는 이미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던 터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 일처럼 세상에 그런 경우가 어디 있냐며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해 공감해 주고 같이 화내주곤 했었던 희야씨.

그는 그 이야기를 하려는 싶으면서도 그의 성정상 타인의 가족 이야기를 가십삼아 쉽게할 성격은 아닌지라 조심스러워 하는 것도 같았다.


"네가 뭐랄까.. 가족분들과 있는데 경직되어 있더라고. 굳어있고 뭔가 어색하고 눈치보는 듯한...? 내가 아는 수니는 애교많고 천진난만한 아이같은 모습인데... 막 까불어대는 오리춤도 추고.. 어머님 아버님은 아마 모르시겠지?우리 수니가 얼마나 까불거리며 막춤도 잘 추고 애교많고 예쁜지. 그치?"


하며 우리 자칭 과묵한 갱상도 싸나이 희야씨는 자신이 하고자하는 말이 부끄럽고 남사스러운지 가벼운 농담과 함께 괜스리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후에도 약간의 정적이 흐른 후 그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냥 그렇더라고. 뭔가 늘 작은 것에도 고마워하고, 진짜 재미 없는 아재 개그에도 소탈하게 웃는 네가.. 가장 편해야 할 가족 앞에서 경직된 모습을 보니 그 간 세월에 대해 말해주는 것 같아서 괜히 마음이 안좋네... 네가 늘 편안한 너의 모습으로 살 수 있게.. 앞으로는 가족과 있을 때 가장 너다울 수 있게.. 내가 더 잘할게. 내가 뭐 어떻게 해줄게라고 얘기는 못하지만, 우리 예쁘게 서로를 아끼며 그렇게 살자."


생각지못한 듬직하고 다정한 그의 말에 뭔가 가슴 깊이 울컥하며 복받치는 기분이 들었다. 파노라마처럼 유년기시절 여러 장면들이 내 눈 앞에 빠르게 지나갔고, 그래서 눈이 시린건지 금세 시뻘개진 눈시울을 감출 길 없이 또르르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언제쯤 나의 유년기에 대해 눈물없이 덤덤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지. 그는 그런 내 눈물을 말없이 부드러운 손길로 닦아주었다.

첫 직장 그만 둘 때 받은 책에서 언급된 현모양처 이야기.

말은 늘 어릴 때부터 "일찍 결혼하고 싶어요. 현모양처가 될 거예요."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연애에 별 흥미가 없었다. 집 밖에서든 집 안에서든 늘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 잘 꾸며진 싹싹하고 모든지 열심히 하는 아이로 살았기 때문에  주말에는 꾸며진 모습이 아닌 진짜 내 모습으로 있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주말이면 모든 에너지를 평일에 쏟아부어 방전 직전 7%, 8% 남은 배터리를 충전할 마음도 겨를도 없이 무기력하게 노트북으로 미드나 보면서 방에서 나오지 않은 채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몇 번의 연애를 했지만 상대방의 무관심 또는 나의 무관심으로 늘 끝은 안 좋았고, 나 스스로도 결혼은 힘들겠구나. 그냥 벌어둔 돈 가지고 해외나 나가서 혼자 살아야겠다. 다짐하곤 했다. 그런 소망을 가슴에 품은 채 계속 꾸며진 모습으로 살다 번아웃이 오고 진짜 떠나자 싶었을 때 꾸미지 않아도 나 그 자체를 사랑해주는 지금의 남편인 그 다정했던 희야씨를 만나 결혼했다.


희야씨는 마치 나를 자식 챙기듯 자상하고 친절했고, 어쩌면 유년기 시절 넉넉치 못했던 애정을 그에게서 더 많이 보상받으며 지냈다. 그 와중에 남편과 나의 좋은 점만 쏙쏙 빼닮은 예쁜 딸을 낳아 누구보다 행복하고 이상적인 가정생활을 이어갔다. 우리 가족은 그 어느 가족보다 서로를 사랑하고 그렇게 행복한 꽃길만 펼쳐질 것 같았다.

 



10.


"안녕하세요. 수니씨. 이번 한 달은 어떻게 지냈나요?"


 나를 상담해 주시는 정신과 대표 원장님께서는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가볍게 미소를 띤 채 다정하게 나에게 안부를 물으셨다.


 여기에 오게 된 이유에 대한 부연 설명을 곁들이자면, 내가 10년 가까이 다니던 회사는 장비를 설계하고 제조하는 회사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근무 중에 공장 내부에서 웅웅 울리며 돌아가는 호이스트 소리에 정신이 아득히 혼미해지며 숨이 코 뒤로 넘어가지 못하고 꼭 누군가 숨 못 쉬게 내 코를 쥐어 틀고 있는 듯이 숨이 크게 안 쉬어졌다. 숨이 모자라고 산소가 모자란 듯한 느낌에 숨을 쉬면 쉴수록 뒤에서 누군가 뒷머리를 잡아채듯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또 어떤 날은 직원들이 평범하게 회의하는 소리가 고성을 지르며 싸우듯 귀에 날카롭게 꽂히듯 들렸고 그때 역시 같은 위와 같은 증상이 나타나고 나도 모르게 불안에 떨며 애처럼 엉엉 울고 있었다.


사실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 2년 전 단순 두통으로 약이나 받으러 간 신경과에서 나를 보자마자 산후/육아 우울증인 것 같다며 체크리스트를 주었고 나는 담담히 그 체크리스트를 받아 들고 체크를 하다 생판 처음 보는 의사 앞에서 펑펑 울어버렸다. 내가 아무리 울보여도, 아무리 집에서 평강공주로 불렸어도 모르는 사람 앞에서 울진 않는데 우울증이라는 말에 뭐랄까. 그 말에 놀랐다기보다 가슴을 훅 파고들었다.


"고생 많았겠네. 고생했어. 이제 우울증이라고 진단났으니까 힘들면 힘들다고 해도 돼."


하고 나를 인정해 주며 무심하게 툭- 어깨에 손을 얹듯 위로를 건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처음 찾은 곳은 신경과라 상담이랄 것도 없이 두통에 대한 필요시 약만 처방받아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을 때만 약을 복용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일시적 증상만 완화될 뿐 점차 만성적으로 두통이 생기면서 이런 증상이 나타나 놀란 마음에 우리 동네에서 제일 유명하고 스케줄 잡기 힘들다는 정신과를 찾았다. 상담 끝에 중증 우울증과, 불안장애에 기인한 공황장애라고 했다.


남편에게 말하니 더 이상의 회사생활은 힘들 것 같다고 자기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것 같다고.. 초기에 자기가 잘 대처해줬으면 이렇게까지 악화가 안되었을텐데.. 자기가 옆에서 제대로 못 돌본 것 같다고.. 네 건강이 우선이니 당장 퇴사하라고.. 괜히 자기가 더 미안해 했다. 마치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자기 때문에 생긴 것처럼. 그렇게 남편과 상의랄 것도 없이 바로 사직서를 올리자마자 서울에 계신 사장님이 다음 날 다른 지역에 있는 우리집 앞까지 오셨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인정욕구를 회사에서도 여기저기 분출하며 열심히 일한 만큼 사장님은 두 달 뒤 내정되어 있던 팀장 자리에 나를 앉히기 위해 특별히 재택근무도 승인해 주시고 휴가도 주셨다. 우리 수니가 아프면 우리 회사 살림은 누구에게 맡기냐며 너만한 적임자가 없다며.. 언제든 돌아오라며 한사코 사직서를 안 받으려 하셨다.

하지만 한 번 와장창 부서진 멘탈은 앞유리창에 금 간 채 고속도로를 달리듯 운행을 강행하면 할수록 걷잡을 수 없이 사방으로 금이 퍼저나갔다. 유리창으로 날아드는 아주 작은 나뭇잎 한장이라도 여기에 덧대어진다면 당장 모든 앞유리가 와장창 부서질 것처럼. 하루에 쳐낼 수 있던 아주 가뿐한 업무도 뇌에 과부하가 온 건지 특정 오류로 메모리에 과부하가 온 컴퓨터처럼 모든 작업에 버퍼링이 걸려 더 이상 업무를 진행할 수 없겠단 판단이 들었다. 그렇게 열심히 살며 원하던 팀장자리를 목전에 두고 나는 여타 평범한 전업주부가 되어 1년 가까이 상담을 받는 중이었다.


"별다른 이벤트는 없던 것 같아요. 다만 아직도 제가 다시 회사에 복직할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가끔 연락주시는 사장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저의 컨디션과 그 기대가 저를 옥 죄어오는 것 같아요. 그 생각을 하면 숨이 막힐 것 같아요. 전 다시 예전처럼 열심히 살 자신이 없거든요."

                    

 그런 나의 말에 의문을 제기하는 눈빛으로 원장님은 차분하게 질문을 하셨다.


"근데 왜 그 기대를 저버리면 안될까요? 수니씨는 이미 받은 만큼, 아니 받았던 것 이상으로 근무하는 동안에 열심히 근무를 하셨고, 지금은 퇴사하셨잖아요. 무엇이 수니씨를 죄책감 들게 할까요? 이 정도 책임감이면 나같아도 수니씨 사장님처럼 수니씨 잡을 것 같아요. 내가 아프건 말건 이렇게 회사를 생각하는 마음이 큰데 누가 이런 좋은 직원을 놓쳐요."


  "그러게요. 저도 제가 되게 바보같거든요? 근데.. 뭐랄까. 누군가에게 예쁨을 받고 완벽한 사람이라는 확신을 주고 싶어서? 아님 그냥 타고난 강박증으로? 그렇게 열심히 10년 가까이 최선의 모습으로 일하며 살아왔겠죠. 저는..

근데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게 책임감 없이 중도하차하는 것처럼 꼭 배신 때리고 뒤꽁무니 빼는 것 같고, 제 잘못같이 느껴져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제가 자진해서 사람들이 저에게 기대하고 기대게 만들어 놓고 막상 저에게 그런 기대를 바라면 날 찾아서 좋으면서도 너무 숨이 막혀요."


이야기하는 도중 원장선생님의 뿔테 안경 뒤 날카롭게 빛나면서 그의 컴퓨터로 무언가를 타이핑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말을 이어가셨다.


"수니씨는 나의 존재 이유나 성취감을 타인의 인정을 통해서 확인하시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나의 존재 이유를 타인이 설명해주지는 않는 거거든요. 그걸로 병이 났는데 나를 생각해야지. 내가 이 인생의 주인공인데. 다른사람이 수니씨를 함부로 평가하게 두어서도 안되지만, 그 평가가 바른 척도이냥 받아드리시면 안돼요. 이것도 연습이 필요해요. 타인의 기대에 저버리는 연습. 수니씨처럼 평생을 이렇게 산 사람은 사실 그게 쉽지 않거든요. 가장 가까운 사람을 대상으로 연습을 해봐요. 남편분 있잖아요. "


"평생을 이렇게 살았는데 그게 될까요? 전 안될 것 같거든요."


그러자 의사선생님은 합당치 않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짓는 그만의 특유의 찡끗한 표정을 지으며 평소와는 다르게 살짝의 소리 높여 말했다.


"평생이라 봤자 이제 30년 좀 넘었는데? 앞으로 살 날이 더 많은데? 남은 인생을 위해서 연습해야죠. 남은 인생도 남을 위해 살 순 없으니까. 설령 내가 자그만한 기대를 저버린대도 나를 저버리지 않을 사람. 남편과 많은 대화를 하면서 나를 위해 다른 사람의 기대도 저버려보고 그로 인해 내가 얻는 것에 대한 행복도 느껴보고! 그게 수니씨에게 가장 필요한 연습이 아닐까 싶어요."


'남의 기대를 저버리는 연습이라..'


그 날 평생 내가 해 본 적 없는..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쿵쾅대는 무서운 연습을 숙제로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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